몇 년 전부터 나이를 몸으로 먹는지 새해만 되면 으례껏 심하게 몸이 아팠다. 올해도 예외는 아닌 듯 그 지독하다는 상하이 독감인가를 앓으며 끙끙거리고 있는 내게 작은녀석이 소리 없이 오더니 묻는다. “엄마가 아픈데 미안하지만요 나한테 십분만 시간 내 줄 수 있어요?” 그 말하는 모양이 조용하고 예뻐 그러마 했더니 제가 영어 단어 쓰기공부를 했는데 그 중에서 스무 개만 골라 불러보란다. 몇 개를 맞게 쓰는지 알고 싶다고. 푹푹 쑤셔대며 아픈 눈을 겨우 뜨고 불러줬더니 다음엔 몇 개나 맞았는가 보아 달랜다. 열세 개나 맞췄다.
공부를 욕심내서 해 본 적이 없는 녀석이 스스로 꼬부랑글씨에 신기해하며 연습해 와 시험까지 보는 행동이 기특하여 열세 개나 맞추다니, 너 참 잘하는구나하며 볼을 만져주며 칭찬해 주니 기분이 좋다며 천사같이 웃는다.
제 이름 석자밖에 쓸 줄 모르고 초등학교를 입학하여 제나라 말을 깨우치느라 힘깨나 들었던 녀석이 이젠 남의나라 말까지 깨우쳐 보겠노라고 열심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이것저것 가르쳐서 보낸다는 얘기를 그냥 흘러 들으며 ‘제 능력에 맞게 순리대로 살아가고 스스로 부딪쳐 가며 배워나가면 되는 것이지’ 했었던 나이기에 옆에서 지켜만 보고 있었을 뿐 이렇게 6학년이 끝나도록까지 공부하라 몰아댄 적이 없다. 제 형도 스스로 터득하며 노력했고 워낙 어려워 찾다가 못하면 물어왔고 그럴 때면 슬쩍 도와주기만 했었다. 그래도 제 할일을 잘 해나가기에 동생 역시 그대로 하 것이다.
이번 겨울방학도 마음껏 뛰놀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놓아주며 이다음에 숨 막히게 공부할 대에 고향의 맑은 공기를 마시듯 이 자유로웠던 시절을 추억하며 신선한 생각으로 머리를 식히도록 해주고 싶었다.
그랬더니 고등학교를 눈앞에 둔 큰 녀석이 이 시기에 저렇게 편하게 놀아버리면 큰일이라며 펄쩍 뛰면서 엄마는 동생을 닦달하여 공부를 가르치려고들 안한다며 나를 나무란다. 그러면서 제 돈으로 중학교 영어 수학 문제집을 사와 수학은 제가 매일 가르칠 테니 영어는 엄마가 맡으란다.
중학교 들어갈 이때쯤 해서 목소리도 변하고 여드름도 더러 생기고 골격도 커졌던 큰 녀석과는 달리 그래도 아직은 내 품안에 들어와 안길 만큼밖에 안 큰 작은 녀석이지만 어느새 영어로 사자며 코끼리를 외워댈 정도로 자랐다.
제 일 알아서 잘하며 동생걱정까지 하는 큰 녀석도 공부욕심만 내면 어쩌나 조바심쳤는데 변진섭이랑 조지 마이클 노래도 좋아하고 테니스도 즐겨 치고 더러 엄마가 좋아하는 고전음악도 들려 줄줄도 알만큼 자랐다.
아이들 자라는 것을 보면 나이 먹어가는 것이 놀라기만 할 일도 아니다. 아이들 크는 것이 나이 먹는 값일 테니까. ‘각기 자기자리를 잘 지키며 살아가자’라는 말 외에 특별히 알뜰살뜰 돌봐준 것도 없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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