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인이 ‘성전’을 선포했다. 거룩한 살륙ㅡ뭔가 걸맞지 않은 어휘끼리의 만남이다. 그러나 신의 뜻을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 보겠다는 곳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이 같은 당착이 저질러질 수 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을까?
필자가 사는 제주도에 교구청에서 운영하는 신성여중·고등학교가 있다. 이 학교의 교훈이 ‘경천애인’이다. 이 글귀는 원래 동양의 논서에서 따온 것이지만, 이 교훈을 지은 분은 필시 다음과 같은 성구를 염두에 뒀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태오 22,37-40).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고통의 신비와 함께 바로 이 말씀이다. 십자가는 수직선과 수평선이 교차하고 있는 형상이다. 위 아래로 뻗친 수직은 하느님 사랑 계명을, 옆으로 걸쳐진 수평은 사람 사랑 계명을 묵상케 한다.
알다시피 10계명은 첫째부터 셋째까지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명하고, 나머지 일곱 계명은 사람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율법학자들은 위로 향하는 계명에만 치우친 나머지 사람 사랑 계명을 잊었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사람 사랑이 따로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셨다. 이것이 예수께서 율법을 페하지 않고 완성하셨다는 말씀의 뜻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수께 이르러 10계명이 온전해졌기 때문이다.
정치, 해방신학 이후 교회는 보다 사람 사랑 계명에 충실코자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율법학자들이 저질렀던 것과 똑같은(단, 이번에는 정반대의 극단으로 나감으로써) 오류가 저질러질 수 있다. 사람 사랑에 몰두한 나머지, 하느님 사랑을 잊는다면 또한 재앙이다. 첫째계명을 빠뜨린 둘째 계명에의 몰두는 신앙과 무관한 정치·사회운동으로 전락할 수 있다.
얼마 전 남미의 작은 섬나라 아이티에서 가톨릭 사제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것이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라고 판단해 선택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선택의 바탕에는 사람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라는 믿음이 깔려있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 그러니까 사람은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다. 보이는 하느님을 섬기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다는 믿음이 정치, 해방신학을 운반하는 수레바퀴이다.
그런데 정치는 사람을 섬기는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수단이다. 추론이 여기에까지 이르면, 정치는 별 어려움 없이 미사와 혼동될 수 있다. 정치야말로 직접적이고 효과적으로 하느님 사랑을 구현하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제 대통령은 어색하기는커녕 가장 이상적인 겸직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자꾸만 뭔가 잘못된 느낌이 든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앞의 추론을 되짚어보면 사람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라는 대목에서부터 논리적 오류가 저질러지고 있었다. 사람은 하느님에 속하지만, 그 역일 수는 없다. 사람과 하느님을 동일시함으로써만, 정치는 곧 미사일수 있고 정치가가 곧 사제일수 있다.
그런데 사람과 하느님의 동일시야말로 인본주의의 오류가 아니었던가. 인간 이성을 신격화하고, 스스로 그의 사제가 됐던 로베스피에르야말로 인본주의, 즉 사람과 하느님의 동일시가 낳은 전형적 인물이었다. 그리고 로베르피에르의 별명은 ‘피의 사제’였다.
사람과 하느님을 동일시할 경우, 사람 섬기는 일은 언제든 그가 섬기는 사람 자체를 파괴하는 폭력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비록 이웃 사랑의 행위일지라도 그것이 사람의 행위인 한 신적행위일수는 없다. 그것을 신적행위라고 착각하는 그 순간부터 사람은 전능자가 된다. 그리하여 사랑의 면목으로 못할 일이 없게 된다. 이웃을 파괴하는 일까지도!
나는 개신교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가 들려주었던 설교를 늘 마음에 둔다. 그는 2차 대전이 시작될 무렵 어느 날 교회의 종각에 풍금 연주자와 함께 있었다. 풍금 연주자는 찬송가를 연주했다. 그 음향은 마음 가득 퍼져 나갔다. 한편 종각 저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방공호를 파고 있었다. 기계삽이 굉음을 내고 사람들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저 종각에서 울려 퍼지는 하느님의 음향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틸리케는 말한다. “위에서 나의 주의에 울려 퍼지는 음향을 밑에서 일상의 일로 부산한 소음 가운데서는 도저히 들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높은 곳에서 울려오는 음률을 듣고 있을까요? 우리가 생활의 소음을 정지시키는 것은 물론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소음 속으로 돌입해 오는 저 음향에 마음을 바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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