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쑤 어느 때 어떻게 해야 하느님을 만나는가 라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다. 아마 그것은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목마르게 느끼는 질문일 것이다. 어쩌면 모든 신자들이 궁극적으로 여기는 질문이기도하다. 왜냐하면 하느님 체험이란 지구위의 수많은 인간들이 저마다 다르게 생겼듯이 저마다 다른 삶의 질곡을 살며 저마다 다르게 체험할 수밖에 없는 각 개인에게 주어진 인간의 존엄성과 맥락을 같이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제라는 사람이 당신 신앙대로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이오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나 자신의 체험과 나 자신의 소망을 들려줌으로써 대답을 대신하게 된다.
나 자신의 체험이란 고통의 극한상황에서 머리에 가득 찼던 물이 다 빠져나간듯한 몽롱한 상태로 가시관 쓰신 주님얼굴의 광채를 찰나적으로 만난 일이다. 조금 자세히 설명하자면 지금도 어두운 시대이거니와 더 어둡던 시대에 피고 장덕필이 되어 군인 지프차에 실려갔다. 시대상황은 지금보다 더 어두웠으나 우리교회의 태도는 지금처럼 허약하지 않았다. 서빙고로 실려가서 한 짝은 크고 한 짝은 작은 고무신을 신고 1.75평의 독방에 수감되었다. 나 말고도 일곱 명의 신부가 끌려갔었다. 앞에서 정강이를 걷어차 주저앉았더니 “누가 앉으랬어?”하는 고함과 욕설이 쏟아지며 뒤에서 엉덩이를 걷어차고 앞으로 고꾸라지면 또 걷어차고 사흘 동안 사람이 바뀌면서 계속 때리는 매를 맞다 보니 살이 까매지고 온몸이 아픈지 어떤지도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렇게 닷새째 되는 날 이것이 죽음인가 하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몽롱한 상태에서 하나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가시관에 찔리고 있는 얼굴, 고통에 짓눌린 모습, 가시에 찔리고 고통에 짓눌리심에도 그 얼굴에선 휘황찬란한 광채가 아닌, 보일 듯 말듯 가까스로 볼 수 있는 진리의 빛광채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알 수 없는 빛의 주님얼굴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말씀이 들려왔다.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립비 1,29).
고통은 인간이 잘못한 죄의 대가로 오기 시작(레위기)했지만 또한 고통은 은총을 받는 즉 하느님을 만나는 특권의 때이기도 한 것이다. 특히 그 고통을 그리스도와 나눌 때(필립비 4,10) 그것은 길지 않고(베드로 전 5,1O)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외 영광에 참여(베드로 전 4,18)하는 은총이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고통의 모습은 곧 그리스도의 모습을 내가 겪을 수 있는 은총의 특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통을 피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고통을 사랑해야 한다.
인간의 고통에는 병고 노동 물질 등에서 오는 육체적 고통과 고뇌 갈등 방황 등으로 오는 정신적 고통, 또 주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영혼의 고통 세 가지로 분류된다.
예수는 이 세 가지 고통을 다 당하시고도 두 가지 고통을 더 당하셨다. 첫째로 육신적, 정신적, 영혼의 고통(마태오 4,1-10)을 사십일 단식 후 광야에서 당하셨고 둘째로 예루살렘 일성(요한 12,12) 셋째로 최후만찬과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애절한 고통 (마태오 26,17) 넷째로 빌가도 앞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다섯째로 십자가에 못박히고 심장을 찔리시는 고통을 당하신 것이다.
그런데 현대에는 자기의 부귀 명예 영화를 위해 예수의 성령을 파는 유다스들이 너무나 많다. 적어도 우리가 예수의 제자임을 고백한다면 우리는 예수의 고통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물론 고통을 받는다고 해서 다 고통의 특권 즉 은총의 때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각자 자기 책임일 것이다. 특히 고통의 때를 은총의 때로 바꾸지 못할 때 그 고통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나 사람이란 더없이 허약할 존재이므로 나 자신이 고통의 극한상황에서 주님얼굴을 뵈었다하여 그 하느님 체험이 언제나 생생히 살아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잊고 때로는 흔들린다.
다만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 즉 고통의 특권을 맛본 사람은 기다릴 줄 알며 하느님만 경배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영혼의 고통인가를 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아마존강 유역에는 초식동물인 아주 큰 도마뱀 종류가 있는데 초식동물이므로 육질이 연해서 많은 개들에게 인기사냥감으로 꼽힌단다. 그런데 그 도마뱀이 나무에 기어 올라가는 것을 개가 보면 동료들에게 신호를 보내고 순식간에 나무아래 개떼가 모이는데 도마뱀은 나뭇가지의 일부가 된양 움직이지 않아서 기다리던 개들은 다 흩어져 가고 결국은 한마리만 남아 지킨다고 한다. 바로 도마뱀을 목격한 그 개인 것이다. 자기 눈으로 보았으므로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기다리다가 사냥감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의 소망은 바로 그 한 마리의 개처럼 하느님 체험에의 확신으로 끝까지 기다림으로써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하는 것이다. 즉 예수를 다시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시고 우리를 그분 곁에 앉히실 (코린 후 4,16)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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