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부끄러워지는 기억이 하나 둘이 아니겠지만 보석처럼 간직하고 싶은 기억보다는 부끄러워서 도저히 잊히지 않는 기억이 내겐 참 많다. 수많은 기억이 세월따라 퇴색되지만 얼굴 붉어지는 민망한 기억은 날이 갈수록 새록새록 마음자리를 차지해가곤 한다. 그 가운데서도 가슴깊이 묻어두었다가 이따금 긴 두레박으로 물을 긷듯 떠올리는 기억이 하나있는데 물동이에는 언제나 부끄러움과 함께 감출 수 없는 기쁨이 찰랑거린다. 부끄러움은 내 젊은날의 어리석음이요, 그리고 기쁨은 나를 작고 보잘것없는 어른으로 만들어준 한 작은아이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다.
그날도 나는 늦은 귀가에 약간 우울해져 있었고 죄책감을 누르듯 힘껏 벨을 눌렀다. 그런데…. 나를 맞은 건 여느 날과 달리 작은 아이의 얼굴하나뿐이었다. 순간 나는 후회했다. 나는 너무 늦게 돌아왔고 더구나 전화조차 않았으며 밤10시까지 아이는 혼자였던 것이다. 막연하던 두려움이 현실로 나타났고 자책감 때문에 나는 허둥대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정말. 알지?” 알긴 뭘 안다고 염치없게도 나는 “알지?”만을 반복하면서 아홉살 꼬마에게 억지를 부렸다.
잠시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이 시간까지 아이는 무얼 했을까. 차가운 열쇠를 쥐고 초겨울 땅거미내리는 어둠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렸을 것이고 초조하고 슬프게 계단을 오르내렸을 것이고 불 켜진 집으로 돌아간 아이들을 생각하며 따뜻한 저녁식사와 포근한 웃음소리와 손길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갑자기 초라해 보이는 아이의 모습에 눈이 아파왔고 그제야 내 입에선 “알지?”가 아닌 “잘못했다”는 말이 터져 나왔다. 말없이 있던 아이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고 불안과 서러움을 쏟아내는 아이의 눈물을 보며 나는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파출부 없이 해보겠노라고 호기를 부리던 한때, 게으르고 태평한 나는 연락 없이 늑장을 부렸고 그 시작까지 아이의 존재는 까맣게 잊혀진 채 내팽개쳐져 있었던 것이다.
일에 대한 책임을 핑계로 저지른 또 다른 무책임, ‘내 것’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찼던 이기심, 갖은 변명으로 합리화하려들던 주변에 대한 소홀함과 무성의…. 내속에서 조금씩 무너지는 소리를 듣는 순간 울던 아이가 말했다. “그래도 엄마 사랑해”.
놀라운 그 말은 참담함에 빠져있던 나를 구해주었고 그날 조건 없이 받아들인 아이의 용서로 말미암아 나는 어른을 용서할 줄 아는 아이에 대해 깊은 신뢰감을 가질 수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아이를 낳은 것만으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사랑을 통해 비로소 부모됨을 배워간다는 뜻밖의 자각에 눈을 떴다.
그 후로도 여태껏, 갖가지 이유를 달고 밖으로 나다니는 못된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는 나는, 날마다 타인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주면서도 남을 용서하기 위해 괴로워하기보다 용서하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한심함을 되풀이 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요즘 한참 사춘기병을 앓고 있는 딸아이의 변덕과 신경질까지도 ‘커가는 아픔이려니’ 여기며 잔잔한 감동으로 지켜볼 수 있는 것은 나를 이만큼의 어른으로 자라게 해준 그때 작은 아이로부터 얻은 깊은 신뢰감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또 어른이 되기 위해 지금 힘들어하는 딸아이 역시 훗날 작은아이로부터 용서받으며 살게 되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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