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 내 머리 좀 봐라 새까맣게 나오는구나!” 내가 뵙기엔 언제나와 같은데 이마 위를 가리키신다. 정말 자세히 보니 새까만 머리가 소복이 나왔다. “엄마는 좋겠네! 이제 다시 젊음이 시작되고 있으니”했다. “얘, 오래 살기만 하면 뭘 하니? 죽을 때 죽어야지”하신다.
이제 새해 들어 일흔여섯이 되시는 어머니, 늘 죽을 때 죽어야지 하신다든가 이제 얼마나 더 살겠니 하신다든가 얼음길이 조심스러워 못 나가시게 하면 얼마나 더 다니겠다고 안 가니 하시면서 열심히 철야기도에 가시고 모임에도 자주 가시곤 한다.
어머니는 ‘얼마나 더 살겠니’ 하시면서 그 때마다 죽음을 맞이할 연습을 하시는 것이다. 신앙 안에서도 두렵고 불안할 때마다 살 만큼 살았으니까 가는 거라고 스스로를 달래시면서 사시는 것이다. 언젠가는 “얘, 그저께부터는 참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자기 전에 내일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면 편안히 당신 곁으로 가게 해 주소서 하고 기도하곤 했지만 언제나 불안함이 있었거든. 그런데 아주 편해졌어. 내가 죽으면 하느님이 날 포근히 데려 가실 거라는 생각이 들더구나”그 순간 난 가슴이 미어지는 듯싶었다.
어머니는 늘 죽음맞이 연습을 하시며 그 외로운 노년을 미사참례와 묵주기도로 사후에 두고 갈 자식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시는 것이다.
어머니께 난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이렇게 한 생애의 반이나 어머니와 함께 살았으니 이것은 정말 큰 축복인데, 또 어머니만큼 훌륭한 벗이 어디 또 있을까? 기쁜 일에 한 치의 사심 없이 기뻐해 주시고 자식이 섭섭하게 해 드렸다고 ‘너 어디 당해봐라’하신 적이 있는가?
그래서 예부터 자식은 마음에 칼을 품고 있고 부모의 가슴엔 부처가 있다고 하지 않던가. 이는 부모와 같은 사랑에 도달해야 가장 완전한 사랑임을 말하는 것이리라. 주는 것만큼 오지 않을 때 섭섭하고 오던 사랑이 멈췄을 때 야속한 것이 인지상정인 이 상식적인 사랑 이상을 해 보지 못한 자신을 반성해 본다.
하루가 피곤하고 그 날의 짐이 무거운 저녁 시간에 아파트 문을 열었을 때 거기 식탁 위에 놓은 반찬 그릇들이 주는 위안은 언제나 생기를 준다. 내가 퇴근하기 전에 반찬을 해서 가져다 놓으시고 빨래를 찾아 빨아 널고 가신 흔적은 얼마나 눈물겨웠는지….
이제 어머니가 더 사시기를 바라는 마음은 예처럼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나는 어떻게 사나’가 아니라 어머니의 한 생애가 한과 슬픔의 세월이었기 때문에 좀 더 사셔야만 한다고 우겨보는 걸 보면 이제 나도 꽤나 어른이 된 것이다.
이 변변치 못한 자식들을 몫으로 지고 온 어머니의 한 평생을 생각하면 그 십자가가 얼마나 무거우실까 죄송하기 그지없다. 어머니에게는 장하기 짝이 없는 자식이 어머니 모르게 저지르는 무수한 잘못과 그로인해 당하는 부끄러움과 자존심 상함을 모르고 계실 것이 더욱 아프다. 이런 못난이를 세상에서 제일가는 자식이려니 하실 우리 엄마.
기도로 해가 뜨고 날이 저무는 어머니의 나날 그 뒤에 하느님의 넉넉한 품이 있음을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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