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서’늪에 돌멩이가 떨어지자 흙탕이 온갖 데를 적셔놓고 있다. 청와대·국회·서울시청·언론… 소위 ‘끝발’ 있다는 자리의 권세 있는 자(루카 1,52)들이 냄새나는 흙탕을 뒤집어쓰고 전전긍긍하는 것이 명주옷이 비맞은 꼴이다.
누가 돌을 던졌는가하는 개운찮은 추측도 뒤숭숭하다. 과연 그것이 죄없는 자가 던진 돌이냐는 것이다. 돌을 던져 이들을 내쫓고 늪을 독차지하려는 권세다툼의 파문이라는 설도 있다. 돌을 맞는 자나 던지는 자나 그자가 그자라는 얘기인 것이다.
부정의 크기는 권세의 크기에 비례한다. 권세없는 자는 설사 욕심이 있더라도 갖다 줄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권세있는 자들의 부정에 비하면, 교통순경이 받는 푼돈 따위는 차라리 애교스럽다. 그러나 딱지를 떼지 말아 달라고 조심스레 내미는 만원짜리 한 장을 고발하는 천진난만한 (?) 교통순경도 있다. 터졌다 하면 수억, 수십억, 수백억이다 보니까 그같은 푼돈 뇌물은 눈감아 줄 수도 있지 않느냐는 동정심마저 들 정도이다.
법만 갖고 될 일도 아니다. 법이 지나치게 강퍅하면 사회가 각박해진다. 우연한 자리에서 한 중견법관이 “법은 7할 정도 실시되는 것이 이상적일 듯하다”고 하던 말이 생각난다. 3할의 여유분이 있어야 사회가 쉬는 숨이 부드러울 수 있다는 말이었다. 법을 자로 재듯이 갖다 대 한 치라도 어긋나면 가차 없이 베어 버리는 사회는 얼마나 각박할까.
동양의 법치주의는 진시황에 의해 확립되었고, 그의 치하에서 가장 철저하게 시행되었었다. 그런데 진시황이 다스렸던 나라는 아무래도 정붙여 살만한 사회였을 것 같지 않다.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마실 물은 깨끗해야 하지만 증류수는 식수로 적당치가 않다.
법만으로는 안 된다면, 무엇으로 해야 하는가? 추상과 같은 법은 몸을 도사리게 하는 효과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마음은 “걸리지 않으면 부정이 아니”라고 독백할 것이다.
예수께서도 법대로만 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분은 법에서 자유로웠고, 급기야 범법자로 처형당하지 않았던가. ‘주의 기도’에서 법으로부터의 자유와 그 자유에 이르는 길을 읽을 수가 있다. 묵상을 끌어 모으는 대목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하는 구절이다. 여기서 ‘양식’은 영혼의 양식으로 확대해석 될 법도 하지만, 그냥 ‘밥’이라고 하는 것이 본의에 가까울 것이다. 이 기원은 사람은 먹고 마시고, 입고 자야 한다는 소박한 진리를 담고 있다.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당시 이것은 금욕의 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하는 것이었다.
일상을 만끽하는 그분을 바리사이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자’라고 욕했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먹보’가 됨으로써 먹고 마시고, 입고 자는 일상사가 하느님의 뜻에 맞는 기도생활일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었다. 인습에 갇힌 기도의 방법을 자유롭게 하신 것이다. 기도의 고정된 틀을 허문 이러한 갱신은 호흡하는 것조차도 훌륭한 기도가 될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은 반(反)생활적이었던 율법주의, 요즘말로 하면 법치주의를 무효화하는 혁명이었다.
법치주의에서 법은 어디까지나 생활밖에, 생활위에 있으면서 생활을 강제하는 힘이다. 반면, 복음은 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그래서 계율적 분위기가 풍기는 일곱 가지 죄종(罪宗)에 대해서 말하더라도 그것을 율법주의적 위협으로 보기보다는 삶을 해방하는 선포로 이해함직하다. 교만으로부터의 자유, 인색으로부터의 자유, 미색으로부터의 자유…. 그리스도의 법은 이렇게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법이다.
또한 법치주의의 법으로부터 삶을 해방하는 법이다. 그리스도인은 해방된 삶을 만끽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법치가 소용없는 사람들이다. 결핍은 욕구를 낳고 욕구는 분쟁을 낳는다. 법의규제는 궁극적으로 욕구의 규제이다. 그러나 해방된 그리스도인은 소유욕에서도 자유롭다(자유로워야 한다). ‘일용할 양식’이면 그것으로 족하다. ‘수서’의 돈을 허겁지겁 삼킨 자들의 면면은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 같아 뵈지는 않는다. 그들의 욕구는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다. 욕심이야 무한한 만큼 불만도 무한대인 사람들이다. 무한대를 소유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법이 꼭 있어야한다. 그러나 ‘일용할 앙식’도 충만한 은혜임을 아는 사람에게는 넉넉한 삶 뿐 아니라 궁핍한 삶도 축복이 된다. 꽃동네 할아버지는 ‘감사할 수 없는 가난은 없다’는 교의를 몸소 증거한 ‘신학자’였다.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요청하는 삶은 충만한 삶이다. 꼭 필요한 만큼이면 그것으로 충만이며, 어느 만큼 더 줄 것인가는 하느님께서 정하실 일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가 정하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은 기도까지도 욕심으로 가득 채운다. 감사하기 보다는 하느님을 강요하고, 심지어 하느님과 거래하려 들기까지 한다.
예수님의 기도는 어땠던가? “될 수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거두소서”. 이것은 고통에 찬 인간의 육성이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오직 당신 뜻대로 하소서” 할 때, 이것이야말로 기도의 전형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신다. 다만 그분의 뜻대로 들어주신다. 이 말은 들어줄 수도, 안 들어 줄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니다. 꼭 들어 주시되, ‘최선으로’ 들어 주신다는 뜻이다. 그리고 무엇이 최선인지는 하느님만이 아신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최소한의 생활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최선의 삶을 내려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그들이야 말로 행복한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카 6,20). 이 말씀이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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