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명절이나 집안 행사 때 찾아가는 시댁은 왠지 불편하기만 하다. 지난 구정연휴를 시댁에서 보내고 빠져 나오듯이 털고 일어나 떠나왔다. 이제는 내 집 같아야 할 시댁쪽으로 정이 쏟아지지 않는 것은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 키우지 못하고 쉽게 살아온 탓일까?

털어버리지 못한 것들로 앙금 되어 남아 있는 불편한 기억들. 복잡한 대명절 연휴길에 불행으로 보이는 사고 난 차량의 일그러진 모습들. 이리 저리 편치 못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아파트 문을 열기 위해 키를 꽂는 순간 누군가 빈집에 왔다 갔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쉽게 따져야할 열쇠가 움직이질 않았다. 분명 집 안쪽에서 아파트 보조키의 단추를 눌러 놓은 것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제하며 옆집 창문을 통해 앞 베란다로 뛰어내렸다. 잠겨 있어야할 안방 창문이 쉽게 열리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방안은 온통 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크고 작은 서랍은 모두 열려있었고 질서 있게 정리해 놓은 옷가지들은 방바닥에 뒤범벅이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거실에는 냉장고에서 꺼내 마신 빈맥주병과 쥐포부스러기, 재떨이에는 담배꽁초, 누군가 구정연휴 불 꺼진 우리집을 찾아 늦은밤 여유 있게 다녀간 것이었다. 남편과 나는 아무 말이 없었고 앞집 아주머니는 자신이 당한 일인양 ‘이 일을 어쩌냐’며 발을 동동 굴렀다. 나의 생활 구석구석 손때 묻은 소중한 것들이 내동댕이쳐진 광경 앞에서 허탈함과 배신감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위로를 해야 하는 것인가? 받아야 하는 것인가?

말없이 찻잔을 탁자위에 놓으며 “내가 요즈음 세상 욕심을 너무 부렸다오” 받아야 할 보속을 찬연히 받아들이듯 남편에게 보내는 조심스런 위로에 말이 짧은 남편은 마음을 다해 나를 위로해왔다.

그래 갖가지 모습으로 비춰지는 무서운 사건들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족의 건재함을 감사하며 이보다 더 큰 비정한 것에 비하자 우선은 마음의 위안을 찾아야 했다. 전부를 뒤져 값이 나갈만한 것은 모조리 없어졌지만 그것들은 결코 우리네 생활 속에 꼭 있어야 할 만한 것들은 절대 아니었다. 보이지 않게 마음의 순수성을 잃어가며 물질의 노예가 되어가는성 싶은 나를 지키시는 주님, 필요 이상의 것들을 당신께서 대신 정리해 주신 것이려니, 작은 찻숟가락 하나까지도 챙기던 내가 자신을 위해 어렵게 마련 손때 묻은 소중한 것들 까지도 미련 없이 포기할 수 있는 의연함이 언제부터 나를 다스리고 있었단 말인가? 불현듯 손님처럼 몸만 찾아가 바쁘게 떠나오는 며느리의 등 뒤로 ‘며칠간 집을 비워 방이 추울 텐데, 가는대로 불 먼저 넣으라’고 당부하시던 시어머니의 허전한 마음이 떠올랐다. 평생을 살아 소중한 아들과 손자 녀석들을 앞세워 도망치듯 떠나는 며느리를 말없이 지켜보시며 얼마나 많은 목멘 포기를 하셔야 했을까? 채워지지 않는 시어머니의 가슴에 이는 허전함과 배신감은 그 무엇으로 위안을 드려야 한단 말인가? 시어머니의 시름위에 며느리인 내가 힘들고 어려웠던 것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면 깊숙이 흐르는 시어머니의 보이지 않는 사랑과 기다림을 깨닫지 못함이었을까?

성숙하지 않았더라도 좋을 며느리의 마음을 아쉬워하는 당신의 포기 아닌 포기는 사랑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