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교황 레오 12세가 최초의 사회회칙 「노동헌장」을 반포하여 1백주년이 되는 금년 1991년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의 사회교리의 해’로 선포했고, 5월중에는 1백주년을 기념하는 회칙을 발표할 것이라고 한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60년대에서 90년대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사회적인 갈등과 혼돈이 중대하여 결국 국가의 최고 통치자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 교회와 신자들에게 있어서 역대 교황들의 사회 복음화를 위한 사회회칙과 사회교리는 사회정의나 사회윤리에 관한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취해야할 태도와 행동의 지침을 보여주고 있다는 데서 너무나 중요하다.
교회의 사명은 복음선교이며 더욱 구체적으로는 사회 전반의 복음화이다. 하지만 오늘의 시대, 사회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사회복음화가 너무나 미약하다고 생각된다.
어째서 신자들이 사회의 복음화에 소극적일까. 그 이유는 대체로 신앙 또는 종교는 개인의 문제이며 마음의 문제(이는 프로테스탄티즘의 특성이다)라고 생각하는데서 비롯되는 ‘신앙과 생활의 분리’와, 정치의 세계는 치열한 권력투쟁과 더러운 거래의 세계라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또 하나의 이유는, 신심생활을 앞세우며, 신심을 충분하게 심화시키고 난후에 사도직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있다. 확실히, 신심이 전혀 없고 기도도 하지 않는 유명무실의 신자는 사도직활동도 하지 않을 것이며, 만일 그러한 신자가 활동만을 한다며 그야말로 위험천만일 것이다. 사실 공의회 후에, 그러한 신자와 심지어는 성직자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신심이 없는 활동, 기도에 근거하지 않는 신자들의 정의구현을 위한 활동은 야권이나 재야의 정치운동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확실히 신심생활이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신심 있고 나서 활동’이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신심을 함께 하는 활동’ 또는 ‘활동을 함께 하는 신심’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다. 신심과 활동의 관계는 전원(電源)과 전등(電燈)의 관계와 같다고 하겠다. 전원이 없으면 전등이 켜지지 않는다. 전원은 전등을 켜기 위해서 축적된다. 사도직활동은 전원에서 전선을 끌어다가 곳곳마다 전등을 켜서 그리스도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는 활동이다. 이러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또 이러한 활동을 위하지 않는다면, 전원을 축적할 필요가 없다. 신심과 활동의 일체성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핵심이며, 사도직활동과 세속적인 활동을 근원적으로 구별 짓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치’라고 말할 경우 정치가, 정당정치, 의회제 정치 등 좁은 의미의 순수정치적인 행동만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현대사회에는 경제도 사회도 문화도 교육도, 때로는 종교마저도 이 정치적인 지배와 영향을 감하게 받는 것이 특징이다. 오늘날에는 정치를 떠나서는 사회의 문제, 인간생활의 문제를 논할 수가 없다.
사람들이 공동생활을 하면서 공동체로서 무엇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한, 여러 가지의 의견이나 이익을 통합하고 결정하는 ‘정치’는 어떠한 사회, 심지어 교회공동체에도 필수불가결의 것이다. 이와 같이 정치는 사회 전체의 이익, 행복, 즉 공동선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목적대로 나아갈 때는 사회를 크게 이롭게 한다. 반대로, 정치가 잘못될 때, 사회에 끼치는 해는 확실히 교회의 사명은 국가를 지배하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는 국가의 위정자들에게 정치라는 것은 하느님을 섬기고 인간에게 봉사하는 일이라는 것을 이해시키고 사랑과 정의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라는 것을 알리지 않으며 안 된다. 따라서 교회는 국가의 지배자가 자신의 책임을 게을리 할 경우 주저하지 말고 깨우쳐 주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국가가 하고 있는 일과 하지 않고 있는 일에 관해서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달리 표현하자면, 구원의 공동체인 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명에 의해 정치의 영역에서는 특수한 책임, 즉 “너희는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오 5,37)라는 예언자적이며 봉사적인 책임을 지니고 있다. 이는 교회가 정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자들이나 그리스도처럼 신앙의 빛으로 정치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그 책임을 본질이다. 그리고 정치에 대한 교회의 책임이 ‘봉사’라는 것은, 교회가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사회공동체의 이익만을 목적으로 한다는 뜻이다. 또한 교회공동체의 예언적 책임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 미쳐야 함은 물론이다.
그리스도의 왕직에의 참여는 당연히 신자들의 정치에의 참여를 촉구한다. 교회의 사명은 정치활동은 아니지만, 정치의 복음화는 교회전체의 사명이다. 따라서 신자의 정치참여는 복음이 지상명령인 것이다.
끝으로 복음의 눈으로 사회를 보더라도 타당한 결론을 도출하는 발언을 하려면 결론을 도출하는 발언을 하려면 특히 사회윤리학적이며 사회과학적인 이론적 분석이 필요하다. 인간 천사가 아닌 한 무턱대고 하는 발언은 날카로운 경고가 될 수 있지만 잘못될 위험도 크다.
또 한편으로 윤리학적·과학적인 이론도 끊임없이 현실에 비추어 그것을 검증해 나가지 않으면 그 자체가 잘못일 위험이 있다.
실제로 복음이 언제나 역설하고 있는 것은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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