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 됐다. 1981년 그해 나는 두 분의 종교지도자를 뵐 수 있었다. 한분은 불교 조계종 종정을 재낸 이서옹 큰스님이었다. 모처럼 쉬러 제주도에 오신 두 분을 ‘붙들고 늘어져’ 기어이 그 분들의 시간과 휴식을 빼앗고 나서야 나는 물러났다.
추기경께서 한라산 중턱 글라라수녀원에 와 계시다는 정보가 있었다. 단 며칠간의 휴가를 나같은 훼방꾼에게 들키기 싫었던지 그 분은 은밀히 이 섬으로 들어와 계셨던 것이다. 정보를 준 사람은 도지사가 간곡히 초대했지만 추기경은 좋은 말로 거절했다는 사실도 귀띔해 주었다.
예수를 뵙기 위해 중풍환자는 지붕을 뜯고 내려갔다. 예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그를 낫게 하셨다(마르코 2,3-5). 나는 중풍환자처럼 순직하지 못했다. 닳고 닳은 신문기자답게 ‘빽’을 써서 한사코 거절하는 추기경과의 면담을 따냈다. 제주교구 교구장님(당시 박정일 주교)을 동원한 것이다. 산중까지 쳐들어간 기자를 물리치기에는 그 분의 심성이 여렸던지 아니면 현지교구장의 주선까지는 차마 물리치지 못했던 것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나는 다음날 주교관에서 보자는 승낙을 얻어낼 수가 있었다.
때는 여름이었다. 추기경께서는 소매가 짧고 눈처럼 하얀 수단을 입고 계셨다. 구식 신자인 내가 한 무릎을 꿇고 반지에 입맞추려고 하자 맞잡은 내 손을 끌어 일으키며 악수로 족하다고 했다. 누가 말했던가. 아닌 게 아니라 그 분은 ‘마음을 편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마음이 편해지니까 나의 질문도 거리낌이 없어졌고 당돌해지기까지 했다. “교회가 왜 정치에 왈가왈부 합니까?” “사랑의 계명과 정의의 실천은 상충되는 것을 동시에 요구하는 게 아닐까요?” 등등 내 딴에는 대답하기 고약스런 질문만 골라 던져 나갔다.
처음 질문에 대해 추기경의 대답은 대충 이랬다. “기독교적으로 죄란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을 거스르는 것이 죄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사랑, 올바른 존경, 올바른 대우를 하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이다. 사회악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므로 기독교적으로도 죄다. 사회적 죄와 종교적 죄는 동질적이고, 해방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 질문은 거의 악의적인 것이었다. 남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이 있는 반면, 정의를 실천하려면 부득이 남과 싸워야 한다. 사랑과 정의가 ‘하나냐 둘이냐’는 논쟁거리였다. 마틴 루터도 사랑과 정의의 상충을 풀어 보려고 고심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그는 사랑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지만, 그 터전을 닦기 위해 정의의 매질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생각했다. 추기경은 이런 난처한 질문에 전혀 난처해하지 않았다.
“사랑도 정의도 하나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므로 이원론은 불가하다. 아버지는 아이를 사랑한다. 그러나 아이가 거짓말을 하면 꾸짖는다. 꾸짖는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꾸짖는 것이다. 정의는 사랑과 상충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아버지가 아이를 아끼기만 하고 꾸짖지 않는다면 참된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또 사랑 없이 꾸짖는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증오일 뿐이다. 사랑 없는 정의, 정의를 저버린 사랑은 모두 불구이다”
마치 미리 준비된 듯이 거침없고 명쾌한 대답에 나는 맥이 풀릴 정도였다. 그날 이후 나는 난제가 그토록 쉽게 풀려 버린 비결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하느님 백성이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하냐고 묻던 바리사이 사람처럼, 나는 추기경께 올가미를 만들어 던졌던 것이다. 나는 바리사이 사람처럼 질문했고, 추기경께선 예수처럼 대답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을 비유로 풀어 들려주기를 즐겨하셨다. 성서 기록자는 심지어 예수께서는 비유로만 말씀했다고 까지 쓰고 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난해하기만한 교의도 복음서에서 읽으면 참 쉽다. 예수께서는 문맹의 어부·목자·창녀들도 쉽게 알아듣고 감동할 수 있는 말씀으로 가르치셨다. 추기경의 말씀도 그랬다.
이서옹 큰스님을 뵌 것은 김수환 추기경을 뵙기 꼭 한 달 전이었다. 제주시 변두리 산과 내를 끼고 지어진 원명사라는 절에서 책상다리를 마주하고 앉았다.
그분께는 불교의 정치적 무감각을 따졌다. 공교롭게도 그분도 부자지간의 예를 들며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었다.
“좋은 지적이다. 화해라고 하나, 무조건 화동하라는 뜻은 아니다. 가령 가정에서도 자녀가 잘못하면 부모가 매를 들 수 있고 또 자녀가 부모의 잘못을 간하기도 한다. 맹목적으로 따라 사는 것은 참된 화해가 아니다. 불교가 이따금 그런 소리를 듣고 또 그런 면도 없지 않지만, 불교정신은 그렇게 물렁물렁한 것이 아니다. 그렇긴 해도, 화합지향이라야 하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이다. 흔히들 역사의 원리는 정·반·합이라고 하고, 대립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래가지고는 세상에 싸움이나 끝날 날이 없을 것이다. 다 죽고 나면 모를까. 정·반·합은 원리적으로 함께 도달할 수 없다는 소리와 같다. 합이 다시 정이 되고, 반을 불러일으킬 테니까. 불교 원리는 대립이 아니라 근본이 ‘하나’라고 한다. 하나가 근본이니까 자비와 화합이 존재의 진정한 모습이다”
추기경께선 사랑을 강조하시고, 큰스님께선 하나를 역설하셨다.
사랑은 두 인격간의 일치운동이라고 한 말이 생각난다. 둘로 나눠진(혹자는 ‘소외’라는 표현을 쓴다) 것이 본래의 하나 됨을 회복하는 움직임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랑과 하나 됨. 추기경과 큰스님은 같은 진리를 같은 비유로써 들려주신 것임을 내가 비로소 깨달은 것은 훨씬 시간이 지난 뒤였다.
10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새삼스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소위 ‘평방사태’를 바라보는 안타까움이 커서이다. 정·반은 주의주장으로는 합에 도달하지 못한다. 논쟁으로 풀리지 않으면 복음으로 되돌아가 봐야한다. 예수님의 해답은 쉽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외침을 잠시 중지하고, 침묵 가운데 “나에게 맞서는 저 사람을 나는 사랑하고 있는가”하고 자신에게 물어보자. 그러한 물음이 당장 해답을 주지는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해답의 시작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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