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해 전의 일이다. 첫 부임지인 제주도 서귀포에서 영세를 했다. 파란 눈의 아일랜드 출신 신부님 이었다.
많은 세월이 흘러간 지금 신부님 얼굴이 잘 생겼다거나 못생겼음을 말 하려는 것은 더욱 아니다. 단지, 영세이후 지금껏 느낄 수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고 싶은 생각 때문에, 신자와 사제는 ‘바늘과 실’ 사이라는 끈으로 비유되기에 신부님 얼굴을 읽어 본다.
우리가 원하는 사제는 어떤 모습인가? 몇 해 전 신학교의 교제에 이런 글을 실은 일이 있다. ‘우리가 바라는 사제가 평신도 모두의 뜻을 하나로 묶을 수는 없어도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는 조용하고, 인자하고, 사랑이 가득한 분이면 좋겠다. 구도하는 사제의 모습은 때때로 흔들리는 우리들 신앙을 가다듬어 주는 따사로움을 느낄 수 있으며 또한 깊은 신앙의 신비를 맛보게 됨으로써 조용한 사제의 위대한 힘을 느끼게 될 것이다’라고.
지금 생각하면, 영세 때의 기뻐했던 감정은 마치 어린애와 다름없었다. 물론 교리공부와 미사예절에 관해 배우기는 했으나 서툴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하루하루를 즐겁게만 살아갈 수 있었으니 신부님 얼굴도 잘 생겨보였고, 매우 존경스런 분으로 맞이했다. 그것은 처음 신앙을 맛본 모든 교우들과 같은 경험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 이때는 흥분할 만큼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살았으므로 걸어 다니는 발뒤꿈치마다 신부님 생각이 따라다녔던 기억이 난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신앙에 대한 깊은 지식이나 경험이 없었으므로 단지, 신부님 곁에만 가도 좋았던 판에 손 만져 인사하고 가까이서 뵐 수 있었기에 가슴 뿌듯함이 일주일간 계속되기도 하였다. 이런 일들은 신앙생활을 돈독히 다져주는 밑거름이 되기도 하였다.
그 후 어렴풋이 알게 되었던 교회에 대한 지식들은 ‘선 무당 사람 잡는다’는 말같이 항상 조심스럽다. 그러기에 세월이 지난연후 철이 드는가 싶다. 해마다 부활절 앞서 갖는 성유축성예절에서 나는 사제의 새로운 약속을 뜻깊게 느끼면서 새로이 서품된 젊은 사제로 부터 은퇴하신 사제와 은퇴를 앞두신, 요즘 말로 세대차가 많이 나는 신부님이 또 같은 목소리고 새롭게 사제의 길에 들어설 마음의 약속을 새롭게 다지고, 교회와 교회의 장상에 대해 순명을 약속하는 예절은 우리들에게 더욱 큰 감명을 준다. 이런 점이 우리 교회가 지닌 자랑이며 세상 질서와 다른 점이 아닐까. 세대간의 격차가 인정된다 해도, 생각하는 점이 각각 일치라도 이 날의 예절에서는 똑 같은 신부님 얼굴을 볼 수 있어서 더욱 좋다.
매주일 미사 때면 우리는 신부님 얼굴을 보게 된다. 오늘은 신부님께서 어떤 말씀의 강론을 하실 것인지 기대가 크지 않을 수 없다. 산술적인 계산이 되겠지만 나의 경우 한 주간의 생활에 영향을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세상 안에 살면서 믿음을 키우고 있는 우리들인지라 사목하시는 내용 또한 그 범주에 머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언론지에 실린 작은 ‘가십’이나 주제들이 교회적이고 신학적이고 영성적인 범주로 다듬어 지는 일 없이 흥미위주의 강론이 메아리 칠 때면 더욱 아쉬움이 많다.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신부님 얼굴은 없을 수도 있다. 생각과 바람이 다른 많은 신자들의 요구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도 우리들은 사제를 바라보면서 언제나 당신은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구원 받아야 할 인간에게 하늘나라의 신비로움을 전하는 성스러운 자로 믿는다. 사제의 얼굴에 숨겨진 사랑을 헤아리며 왜 세상은 사랑이 메말라 가고 있는지 질문을 갖게 되며, 사제의 가슴에 새겨진 순명의 정신을 귀하게 여기면서 이것이 바로 진정한 부활정신임을 깨닫게 된다.
새로이 탄생한 사제로 부터 청순하고 겸손한 얼굴을 대할 수 있어서 좋고 강론을 통해 전해지는 말씀으로 우리 마음의 때 묻은 앙금을 시원하게 씻어낼 수도 있다. 또한 서품된 지 오래되신 신부님으로 부터는 우리들 마음을 꼭 찌르는 족집게 강론으로 우리 얼굴을 홍당무로 만들기도 해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 또한 좋다. 하여튼 사제와 우리의 신앙은 불가분의 관계인가 싶다. 나는 신부님의 얼굴에서 순명의 얼굴을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이상으로 여긴다. 그렇기에 우리들도 교회의 가르침에 토를 달지 않는다. 이것은 신부나 평신도 모두가 세상의 소금이기 때문이다.
소금은 좋은 물건이다. 그러나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겠느냐? 땅에도 소용없고 거름으로도 쓸 수 없어 내 버릴 수밖에 없다. 둘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루카 14,34-35).
사랑이니 봉사니 순명하는 일은 조용한 기도를 통해 이룩되어야 될 정신운동이 아닌가 싶다. 우리교회 안에는 묵묵히 맡은 일에 전념하며 순명의 덕을 기르는 교우가 대부분이며 신부님 얼굴을 보고 느끼며 열심히 살아간다. 어찌 이들을 두고 불의를 보고 입을 다물었으며 부정을 보고 눈을 감았다 할 수가 있는가. 이들은 진정 불의와 부정을 거부하며 기도와 참회로 밝은 사회가 되도록 간구한 사람들이다. 아니 훌륭한 신앙인이다.
요즘 한창 꽃피는 계절이다. 부활의 기쁨도 나눌 수 있었다. 나의 짧은 신앙기간이긴 하지만 해가 갈수록 희석되고 있는 사제의 순명정신을 느끼면서 세상이 많이 변했음을 실감 한다. 우리교회는 사제와 신자의 관계가 바늘과 실의 인연으로 묶여 있다. 어떤 일이 있을지라도 신부님 얼굴은 봄날처럼 항상 밝고 화창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닐까?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