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신문 사회면에 일방통행 길을 거슬러 오는 차와 교통법규에 따라 바르게 가는 차가 만나 시비가 벌어져 왈가왈부 말다툼 끝에 일방통행을 어긴 편의 어이없는 주장에 화가 나서 뺨을 치는 상대방을 향해 몰매를 가했다고 한다. 특히 뺨을 친 편은 학교의 스승이었고 몰매를 준 편은 제자였다는 것이다. 스승은 버릇없는 제자들을 깨닫게 하고자 일침을 준 것이었으나 제자들은 잘못을 깨닫기는커녕 목소리 높여 밀어붙이기만 하면 이긴다는 폭력주의에 확신을 가진 학생들이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요즈음 세상은 올바로 사는 이가 힘 있고 권력 있는 이의 폭력에 억압받는, 달리 말해 불의에 갇힌 진리와도 같은 세태임을 만인이 믿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세상에 “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주고 누가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내어주어라”(루카 6,29) 하신 주님의 성서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추님께서는 보복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으로 사랑을 위해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뜻인데 폭력주의 세상에 살고 있는 나는 주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우리 주위에서도 진리를 가리기전에 목소리만 크면 진리의 편인 듯 오도되고 조용히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마치 죄인 (?) 취급을 당하는 것은 아닌가? 권력과 재력 등 불의의 폭력이 난무하는데도 그것이 합리화된 진리로 오도되며 모든 이로부터 능력 있는 이로 인정받는 세상은 아닌가? 어쩌면 지금 세상은 능력 있는 자가 자기과시를 위해 자기이권에 도전하는 것이 정의이건 진리이건 무조건 철저히 복수하고 보복하는 것이 위험스럽게도 보편화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오늘의 세태를 모르시고 엉뚱한 말씀을 하시는 과대망상증 환자이신가. 하루가 다르게 발달하는 첨단문명의 경쟁사회에서 능력 있는 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인가.
요즘 세상에 사랑실현을 위해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으며 복수와 보복하지 말라는 주님의 용서하는 황금률을 우리가 믿고 실천하기엔 너무 어렵고 불가능하게 생각된다.
어느 사회학자가 ‘한국인은 오랜 역사동안 적대감정의 한(恨)을 분출시키지 못하고 내적으로 억압받고 축적되어서 자가중독(自家中毒) 상태에 빠져있다’했듯이 정말 우리는 옛글귀의 원(怨)을 ‘끝내 못 풀고 죽었을 때 완전히 죽지 못하고 이승을 울며 헤매는 원귀가 된’ 의미로 표현하고 그러한 일생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한(恨) 풀이 하려는 사람들인가?
우리는 매일 드리는 ‘주의 기도’에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하며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매일 용서를 청하고 있다. 이 사회 돌아가는 것과 세태가 보복과 복수로 얼룩져 있더라도 우리는 용서하고 용서를 청하고 있다. 떼제의 로제형제 편지에서 ‘용서란 무엇입니까? 하니 일찍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가장 믿기 어려운 그러면서도 가장 자비스러운 하느님나라의 현실’이라 했다. 우리는 이미 도래한 하느님나라 완성을 위해 변화시키고 성장시켜야 한다.
‘그리스도를 사는 일중 가장 어려운 모험이 용서라는 사실이며 또 용서하는 것’이라는 말과 같이 바로 용서하는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내 이웃을 변화시키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에서 용서해주는 계산적 용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용서하는’ 사랑의 삶을 우리가 살아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카 23,34) 이 말씀처럼 내가 그들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 없이 타산 없이 무조건 용서해주는 한없는 사랑뿐이다.
‘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주라’는 말씀은 그들이 하는 짓을 모르고 있기에 모르는 그 행위를 용서하는 것뿐이다. 용서해줌으로 변화되는 것을 알고자하는 용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랑한다’ 하셨으니 사랑으로 용서하는 것뿐이어야 한다. “일곱 번 뿐만 아니라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 18,22)고 하신 말씀은 숫자의 개념이 아니다.
무한한 사람을 가지고 끝까지 용서하는 뜻은 알아야한다. 우리의 용서하는 삶은 ‘뺨을 치면 다른 뺨을 내주는’ 무신(無心)의 자비한 마음을 가져야하고 ‘누가 겉옷을 빼앗으려 하면 속옷마저 내어주는’ 여유 있는 마음 곧 자유로운 마음을 가져야한다. 요한네스 브란덴의 말대로 ‘용서는 자유로운 자만이 가능하다’. 용서하지 못하면 뺨치고 발로 차는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치면 내주는 용서하는 사람을 보이면 상대에 얽매이지 않고 용서를 통하여 새로운 사랑의 관계를 이루게 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를 시험하려고 율법의 논리로 올가미를 씌우려했지만 예수께서는 자유스럽게 용서해주심으로써 증오한 자의 교활한 마음을 깨닫게 하셨고 그 넓은 자비와 사랑으로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실 수 있으므로 사랑의 관계를 이루셨다. “신앙생활이 성숙한 사람들에게는 지혜를 말합니다. 다만 그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나 이 세상에서 곧 멸망해버릴 통치자들의 지혜와 다릅니다”(Ⅰ코린토 2,6).
이 세태를 신앙의 깊은 눈으로 보는 사랑은 뺨을 치는 자를 향해 발로 차는 능력 있고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 다른 뺨을 내주고 속옷까지 내어주는 넓고 용서해주는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사는 하느님 앞에 능력 있는 사람이다. 내게 있는 한(恨)을 또는 원(怨)을 푸는 복수와 보복이 아니라 복음적 용서로 자유스럽게 주님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만일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지는 않았을 것입니다’(Ⅰ코린토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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