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쓰는 언어 중에 가장 흔히 사용하는 단어가 ‘사랑한다’는 어휘일 게다. 특히 주님의 말씀을 믿고 살고 말하는 이들은 이 단어를 친숙하고 쉽게 많이 쓴다. 생각해보면 ‘사랑한다’는 어휘처럼 막연하고 불투명하고 추상적인 언어도 없다. 어디서 시작하여 어디까지 가는 것이 ‘사랑한다’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인지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쓰고 요술같은 어휘인지도 모른다.
‘사랑한다’는 어휘는 반드시 표현된 것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되지 않은 의미까지 함축해서 포함할 수 있으므로 더욱 개념설정이 어렵다. ‘사랑한다’는 뜻 가운데는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지 않는다는 모순된 내용까지 포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개념의 분명한 설정을 위해서는 그 분기점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분명히 할 것은 ‘사랑하는 것’과 ‘사랑한다’는 사랑의 실체(생명)을 찾아야하며 ‘사랑하는 것’의 뜻과 ‘사랑한다’의 실천성을 명백히 하는 것이다. 사랑의 실체는 누구나 알고 있듯 예수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으로 확실히 드러났다. 우리는 구제사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배웠고 인간의 육신을 취해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써 빵이 되신 그분을 믿고 모시며 살고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개인적으로 공동체로서나 ‘사랑한다’는 것을 오로지 노래와 기술로서만 미화해오지는 않았는가 반성해 볼 일이다. 특히 그리스도의 유산인 교회가 가난한 이를 향해 얼마나 목청돋우어 사랑해왔던가? ‘사랑한다’는 뜻의 진정한 실체를 찾거나 확인하거나 존재론적인 유무(有無)조차 상관 하지 않는 채 ….
성 아오스딩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처럼 혹은 사랑을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진 것을 내놓을 때만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랑의 결정적 순간은 ‘내 것을 내놓을 때’사랑의 실체가 드러난다는 뜻이다. 자기가 가장 사랑한다고 하면 자기 것 중에 가장 귀중한 것을 내놓을 때 사랑의 실체가 증거된다는 내용인 것이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께 와서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계명이다’하고 대답하셨다. 그 젊은이가 ‘저는 그 모든 것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무엇을 더해야 되겠습니까’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하셨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풀이 죽어 떠나갔다”(마태 19,16-22). 예수님과 이 젊은이의 대화를 볼 때 부자청년은 자기생활에서 인간에 대한 사람의 계명을 지켜왔기에 ‘사랑한다’고 말해왔고 ‘사랑한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을 게다.
‘그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풀이 죽어 떠나갔다’는 상황에서 분명히 ‘사랑하는 것’과 ‘사랑한다’는 분기점이 드러난다.
우리는 자기 것을 내놓아야 비로소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정곡을 찌르는 사랑의 핵심을 알아들어야 한다. 그 말씀을 알아들을 때 ‘사랑한다’는 수없이 많은 표현에서 얼마나 열매 없는 빈 사랑을 말해왔던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쉽게 미화시키고 과장까지 서슴지 않는 교회의 사랑도 막상 자기 것을 내놓는 실현의 순간에 사랑의 실체를 드러낼 수 있을게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랑의 성찬(聖讚)만을 공소(空疎)하게 노래해 왔을 뿐 생명 있는 사랑의 성찬(聖餐)을 잊었던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나그네에게 따뜻한 환대를,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병들었을 때 돌보아줌을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주는(마태 25,35-36) 사랑, 즉 ‘사랑한다’는 성찬(聖餐)이 절실하게 성찬(聖讚)에 식상했다. 사랑이 필요한 이에게는 성찬(聖讚)적 사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피부에 닿고 실감하는 현실적인 사랑이 요구되는 시대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와 같은 사랑을 ‘벗을 위해 자기목숨을 바치는’(요한 15,13) 것이 사랑의 절정이라 말씀하셨고 몸소 그 모범을 보이셨다.
우리는 생명까지 내주는 그러한 경지에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생명다음으로 중요한 정도의 것은 내놓을 수 있는 교회 그리고 신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가진 것 중에 가장 중요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사랑의 실체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은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하더라도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1코린 13,1)고 하신 바오로 성인의 서간으로 이어진다.
이제부터 우리는 사랑의 노래를 부르지 말자. 이미 빈 소리에 불과한 사랑의 노래는 한계점에 이르렀다. 이제 사랑의 실체를 위한 열매있는 사랑의 성찬(聖餐)을 위해 없는 이에게 필요한 것을 먹일 수 있고 줄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의 잔치를 마련해야 한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5-37)에서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하자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하신 말씀처럼 우리 모두 진정한 사랑의 성찬(聖餐)을 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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