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신 하느님, 십자가의 하느님’
언제 어디서나 이 두 마디의 기도가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튀어나온다. 그것은 기도라기보다 차라리 절규에 가깝다 내 신앙은 어느 일정한 장소나 머리 속에서 행하거나 궁리하고 추리하는, 말하자면 형식에 맞추거나 추상적인 징후를 끌어내거나 하는 것에 있지 않다. 오랜 세월을 두고 조금씩 스며든 신(神)의 존재가 내게 생기(生氣)를 불어넣는 요결(要訣)로 나타났다고 할까? 그런 바늘구멍만큼의 신앙이라도 없다면 나는 이 글을 쓰지 못하리라.
아침저녁 대학 교정을 드나들며 나는 가끔 엘리어트(T.S. Eliot)의 시(詩)를 기억 속에 떠올린다.
우리는 텅 빈 사람들
우리는 박제(剝製)된 인간들
짚으로 가득 찬 대가리를
서로 의지하고, 아아!…
깨어진 유리 위를 지나는 쥐의 발자국 소리….
나날이 흔들어대는 데모대들의 성난 팔뚝들, 화염병과 최루탄에 저린 매운바람, 유리창 깨고 불 지르는 과격행위, 무법천지인 밤중의 폭력들, 성폭행, 돈 놓고 화투치기, 비오고 바람 부는 운동장에 기합 받는 신입생들, 가목을 쥔 사랑 없는 상급생들… 물론 대학의 일부 모습들이지만, 이런 것들은 대학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쳐 가히 시인의 ‘황무지’를 연상케 한다.
슬픈 일은 그릇된 것을 보고도 말 못하는 어른의 입장이다. 가치관의 혼돈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신 있는 충고가 자칫 말과 행동의 폭력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학생 편으로 본다면 시장바닥의 상인처럼 ‘더 받자, 깎자’ 따위의 등록금 흥정을 해야 하는 가난한 대학이고 보니, 어찌 스승에겐들 신선한 느낌이 들겠는가?
이처럼 교육이 상품으로 바뀐 오늘날 이사회는 어디에다 기대를 가질 것인가? 이때 종교인은 좀 더 순순해야겠다고 생각된다. 나날이 늘어나는 교회 그리고 사찰들. 벌통으로 모이는 꿀벌들처럼 그곳으로 모여드는 승용차들의 행렬, 성스럽고 행복에 찬 신자들의 모습….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밝음이 왜 이사회의 어두운 저쪽에까지는 미치지 못할까?
예수를 따르고 제자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복음을 들고, 빵을 얻고, 질병을 고치는 기적을 바라서인지? 만찬회에 참석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교회가 사교장이나 전시장의 효과가 있거나 헬스클럽이나 이용소처럼 스트레스해소에 도움이 되기 때문일까? 아니면 유다처럼 예수를 팔아 치부할 기회가 있어서 일까? 물론 그중에는 예수와 함께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만약 교인들이 사랑만 받고 행복만을 바라 예수를 따른다면 그들은 참교인일 수가 없다. 만약 이토록 이기적인 신자들만 교회 안에 우글거린다면 교회는 빛을 잃고 예수그리스도의 슬픔이란 한낱 우스꽝스런 우화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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