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서울대상대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 중, 68년 통혁당사건으로 투옥되어 88년 8월에 석방된 신영복씨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글을 모은 것입니다.
한때 사형선고를 받았고 그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 20년 20일을 감옥에서 보낸 한 인간의 삶은 과연 무엇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으며, 누가 보상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그 옥살이가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이 시대의 모순을 대속한 십자가일진댄….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감옥에서 부모·형수·계수씨께 보낸 서간을 모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햇빛출판사)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모든 찌꺼기를 다 증류해버린 맑고 단단한 사색의 결정체였습니다. 그의 글은 일반인들이 예상하듯 신변잡사를 적은 편지글이나 감옥 내의 처우에 대한 고발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친 인간적 자각과 성숙의 기록이었던 것입니다. 1968년 당시는 박정희정권이 삼선개헌을 앞두고 지식인을 탄압하던 시점으로 숱한 4·19 세대가 몰락·좌절·변절한 지금 신영복씨는 20년이란 세월을 볼모로 오히려 그 20년을 의연히 지켜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글을 읽으며, 가르멜 봉쇄 수도원에서 병고와 싸우면서도 깊고 심원한 관상의 경지에 이르렀던 데레사 성녀를 생각하곤, 한 인간의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가족과 이웃 그리고 사회에 대한 애정, 감옥 내에서 육체노동을 하며 사회의 최하층사람들과 교류하면서 포착해낸 그 심오한 메시지를 느꼈습니다.
양심수! 이 땅의 어두운 정치상황 속에서 진정한 민주화와 참 가치의 민중적 삶을 구현하기 위해 온 몸을 던져 군부독재정권에 맞서 투쟁했던 그들은 여전히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진 채 감옥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신영복, 서준식, 김근태 등과의 만남을 통해 저는 양심수 석방문제가 그들 개개인의 인권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자행된 구시대의 역사를 청산한다는 관점에서 해결되어야 한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암울했던 군부독재의 굴레를 떨쳐버리고 민주화를 위해 투쟁할 수 있는 자신감과 전망은 과연 어디에서 왔습니까. 바로 그들이 아닙니까!
뿌린 자가 거두고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로 돌릴 때 그 사회는 더욱 건강한 도덕적 기반을 갖출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서슬 푸른 군부독재하에서 너나할 것 없이 꿀 먹은 벙어리를 강요당했을 때 그들은 과감히 입 달린 구실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그들은 변모하는 민충의 신새벽에서 정당한 위치와 보람을 찾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천주교회는 5월을 성모성월로 정해 각별히 로사리오기도를 바치며, 시대의 거짓과 불의에 항거하시고 압박받고 설움 받는 가난한 이들을 해방하고자 하시고, 그 결과 당대의 통치자들과 우매한 대중들에게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어머니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1991년을 살아가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 시대의 ‘예수’와 ‘그 어머니’는 누구입니까!
이 시대의 비리와 거짓과 불의를 고발하며 억눌린 민중의 알 권리, 말할 권리를 위해 자기 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민주열사들과 감옥에서 양심을 지키며 투쟁하는 양심수들을 저는 생각합니다.
또한 아들의 고난받는 삶을 예견했고 감내해 왔던 성모 마리아, 아들 예수의 시신을 껴안고 아파하시는 성모 마리아, 그 ‘파에타’의 모습을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서 두 눈 똑똑히 뜨고 보지 있지 않습니까.
가정의 달 5월, 성모성월 5월을 지내면서 우리는 누구를,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거짓된 인내와 굴종이기 보다는 정직한 분노와 충고가 있기를 염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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