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여 년 동안 이일 저 일을 집적대다가 국민학교로 되돌아 왔더니 주위에서 매우 수상쩍어 한다. 마음 편하게 잘 택했다는 이들도 더러 있지만 대개는 기왕이면 중등학교로 갈 것이지 왜 초등교사를 택했느냐고 안타까워하거나 민망스러워한다. 더구나 굳이 산골학교로 찾아간 심사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초등교사를 택한 데는 이런저런 이유들이 있었지만 내심에 숨겨둔 한 가지 이유는 이 길이 예수의 길에 한걸음 더 다가간다고 여긴 점이다.
신자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크고 작은 일 안에서 예수의 길을 따르려 한다.
이웃의 길흉사에 궂은 일 힘든 일을 자원하여 맡는가 하면 어려움을 겪는 이웃을 위하여 많은 돈, 시간, 정열을 쏟기도 하고, 피에서 시작하여 안구, 콩팥 등 신체의 일부를 내어주기까지 한다. 한편 올봄처럼 시국이 어려울 때는 자신에게 돌아올 숱한 박해를 무릅쓰고 시국 선언에 나서는가 하면, 사제들은 단식기도를 택하기도 하였다. 개인적인 차원, 사회적인 차원, 역사적인 차원에서 벌이고 있는 가난한 이를 위한 선택은 그 빈도와 유형을 다 꼽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어디 신앙인의 전유물인가. 신앙과 무관한 이들이 벌이는 노력들이 그 횟수나 강도에 있어서 신앙인을 훨씬 능가한다.
그런데 막상 국민학교로 돌아오고 바라던 대로 산골마을 선동분교까지 오고 나서가 문제이다. 외견상으로는 제법 바라던 상태에 접근하고 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가족이 따라오질 않아서 혼자 누리고 있지만 오두막집에 장작 쪼개어 군불지 피고, 마당가에는 채소를 가꾸고 들로 산으로 쑥이랑 산나물을 뜯으러 다니며 그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아이들도 잘 따라 곧잘 어울려 뒹군다. 그러나 꿈꿔오던 교육, 충만한 삶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우선 복식 학급이 감당하기 어렵다. 3·4학년 12명을 가르치고 있는데 늘 한 시간이 반시간으로 줄어들어 교과서 진도 맞추기에 급급하다. 더구나 아이들 숫자가 적으니 누구하나 제쳐놓을 수 없어 결국 열두 학년이 되니 속수무책이다. 또 아이들의 기대가 문제다. 누가 어떻게 길들여 놓았기에 자기들은 읽고 쓰고 셈할 줄 알면 족하다며 그 이상을 해보려 하질 않는다.
이런저런 핑계보다 결국 문제는 내게 있다. 교장, 교감선생님의 간섭도 안 받게 되고 극성스런 학부형의 눈치를 의식할 필요도 없고, 아이들은 그저 순하기만 하니 본시 게으르고 무슨 일에나 핑계 많던 나는 마음뿐이지 지속적인 실천을 해내질 못한다. 아이들 가운데로, 주민들 속으로 뛰어들진 않고 뒷전에서 불평이나 늘어놓은 자신이 한심스럽기까지 하다.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을 것 같다. 좋은 뜻으로 시작한 일이 막상 진척되다보니 시작할 때의 마음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어서 안타까워 할 것이다.
정치에 나선 이들은 개인의 힘으로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우리의 정치문화 앞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윤리성이 비집고 들 데가 없는 상거래 관행 앞에서 관리들은 누적되어 온 관료사회의 관행을 마주하고 월급쟁이들은 허구한 날 실적에 쫓기면서 ‘다 그런 거지 뭐’하고 체념하기 십상이다. 농민도 노동자도 모두들 자신의 힘으로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구조적 상황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왜 나는, 왜 우리는 모처럼의 결단을 수포로 돌리고 마는가? 우리를 싸고 있는 구조적 상황이 엄청난 장애임은 틀림없다. 그렇다고 예수를 싸고 있던 상황은 장애가 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지 않는가. 결국 구조적인 장애를 어떻게 극복해 가느냐가 과제이며 그 단초는 역시 자신으로부터 찾아 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먼저 잘못은 그 모처럼의 결단이 엉터리가 아니었나 물어봐야겠다. 사람들은 엉터리 결단을 알러 객기 부린다고 한다.
객기는 객이란 말이 가리키듯 자신의 삶에 뿌리를 두고 자라난 결단이 아니고 밖에서 들어와 일시적으로 덧씌워진 기의 발로이다. 일상의 삶이 쌓이고 쌓여 그쪽으로 분출될 수밖에 없었던 것과는 달리 갑자기 딴사람이 된 듯 용단을 내리는데 옆에서 보면 의아스럽고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는 회개로 갑자기 딴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믿고 있다. 그러나 삶의 근본적인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회개를 생각할 수는 없지 않는가.
이제 우리는 쉽사리 객기에 대비되는 말로 투신을 떠올릴 수 있겠다. 평소의 삶에 튼튼한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민중의 열망을 꿰뚫어 보고 그 열망을 가로막고 있는 구조적 장애를 창조적으로 넘어서는 섬기고 나누는 삶을 실천해내는 모습 말이다. 그 삶은 민중과 깊이 연대되어 있으므로 한없는 힘을 얻어 한결같고 끝까지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객기와 투신 사이에 뭔가 있어야 되겠다. 기왕의 신통찮던 삶을 이제 와서 어쩔 수도 없고, 제대로 회개하면 좋겠지만 그도 마음같이 되진 않고, 민중의 열망을 꿰뚫어 볼 안목을 갖추지도 못하였고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살아갈 용기도 부족하다. 그렇다고 어쩌다 객기나 부리다 체념하고 말기엔 억울하다. 객기를 부리고 나면 부끄럽고 후회스러워진다. 그런데 더러 신명이 나서 무슨 일을 저지르고 나면 길게 이어지지 못하여 찜찜하지만 되돌아보고 빙긋이 웃을 순 있다. 신명이란 그 뿌리가 자기 안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신명이 나서 선동분교까지 들어왔다가 지금은 신명이 사그러들어 풀죽어 있고 또다시 신명이 나는 날엔 열심히 살고, 가르치고 이렇게 거듭되다가 어느 날 투신으로 이어지길 꿈꾸어본다.
이번 주부터는 오일창씨(안동 용문국교 선동분교 교사), 조돈만씨(울산 경상일보 논설실장), 강길웅 신부(광주대교구 함평본당주임), 원요동 신부(꼰벤뚜알 성프란치스꼬수도회)께서 집필해 주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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