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어린이 미사 시간영성체 때의 일이다. ‘그리스도의 몸’ 하고 성체를 영해드리는데 한 할머니께서 ‘아멘’이라고 대답하는 대신 “신부님, 저기 원비 갖다가 놨으니까 원비 잡수셔” “예! 원비요?” “그래요 꼭 먹어야 돼” “고마워요 할머니”
그리고 난 후 몇 주일 지나서 그날도 영성체를 영해주고 복사가 나를 툭툭 치면서 원비 한 박스를 내미는 것이었다. “신부님! 이거 저 할머니가 잡수시래요” “그래” 하면서 제대 밑을 보니 바로 그 할머니께서 유치부 어린아이들 앞에서 손짓을 하시면서 “신부님! 그 원비 잡숴. 지금 한 병 따서 잡숴” “아-예 고마워요 할머니” 마음 같아서는 할머니가 보는 앞에서 제대위에서 그대로 원비 한 병을 마시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지 않은가. 할머니는 매주 원비 한 박스를 가져오신다. ‘원비 할머니’, 내게는 얼마나 고마운 할머니신지 모른다. 그 할머니가 사시는 곳은 공소이기 때문에 주일 미사에 나오시기 위해서는 차타는 곳까지 한참을 걸어 나오셔야 한다. 올해 연세가 90이기 때문에 허리가 굽으셨다. 걷는 것도 힘이 드신다. 그런데도 주일이면 꼭 미사에 참석하시는 것이다. 할머니의 아들, 며느리는 서울서 살기에 손수 밥을 지어 드신다. 이제 나는 주일이면 그 할머니의 모습을 찾는다. 그런데 이번 주일에 할머니께서 나오시지 않았다. 찾아가 봬야겠다. 어디가 아프신지….
그리고 지난 가을 추석에 나는 흰 와이셔츠와 아주 멋있는 넥타이 하나를 선물 받았다. 신부 되고난 후 처음 받아보는 넥타이였다. 나를 도와주는 아가다씨에게 “누가 이것 가져왔어요” 하고 물었다. “예 그거요, 매일미사 때 지팡이 짚고 오시는 허리 고부라지신 할머니 있죠. 그 할머니가 사오신거예요. 할머니께서 생활보호 대상자에게 주는 돈으로 사오셨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콧날이 시큰해졌다. 고마우신 할머니…. 넥타이 색상이 할머니가 샀다고 보기엔 너무 곱고 멋있었다. 그래서 할머니를 위해 흰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봤다. 교우들이 “야! 신부님 새신랑 같으시네요” 하며 웃는다. 신부된 후 처음으로 매보는 넥타이기에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그러면 어떤가, 어느 아내가 건네준 넥타이보다도 더 사랑이 담긴 넥타이인데.
내 주위에는 이렇게 할머니들이 많이 있다. 매일 아침미사 30분전에 20분 동안이나 계속 종을 치시는 종데레사 할머니, 원비를 갖다 주는 원비 할머니, 넥타이를 사다 준 할머니, 몰래 다가와서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는 할머니, 꽃 손수건을 준 할머니, 날 따듯한 부활날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는 할머니 ‘아- 할머니, 할머니 나의 할머니’ 성모님과 같이 사제들을 위해 매일 묵주의 기도를 바치고 미사참례를 하기는 할머니, 할머니, 기도부대 할머니들….
나는 이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나면 성당이 얼마나 쓸쓸할까를 생각해 본다. 아마도 이런 할머니들이 계시기에 우리나라 교회가 발전하지 않을까? 그런데 내일은….
지금까지 수고해주신 수원교구 남양본당주임 이상각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음호부터는 연극배우 손숙(헬레나·성루한강본당)씨가 맡아주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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