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품식때면 까치발을 딛고서라도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예식에 참례하는 사람들로 항상 성당이 비좁다. 오늘은 비좁은 성당도 모자라 눈이 하얗게 쌓인 마당에 발을 동동 구르며 서있는 신자들의 모습 속에 눈보다도 더 하얀 하나의 염원을 발견한다. 그것은 필경 주님을 목격하고 구원을 만끽한 시메온의 것과도 같은 기다림과 기쁨 그리고 경건함이리라. 참된 목자를 기다리는 그 갈증 속에서 오늘 내 머리위에 성령이 내리시어 주님의 종으로 축성하셨다. 한없이 비천한 내게, 그분을 알면 알수록 고개가 숙여지는 모자라는 내게 주님은 수천의 경건한 눈길을 허락하셨다. 두려움과 눈물을 배어내는 감사가 온통 나를 휘감는다.
복음속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종(마르10, 45)과 목자의 모습(요한10, 11)으로 드러내셨다. 그분은 신적 구원질서 안에서 모든 권한을 봉사로서 행하고자 하셨다. 성전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마태12, 6)율법과 제도에 얽매인 유다 사제들을 해방시켜 주셨고, 크리스찬 사도직의 임무는 성전을 지키고 거룩한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인간」을 거룩하게 하는 것임을 주지시켜 주고 있다. 또한 예수님은 당대의 세습적 전통을 거부함으로써 당신의 사제직은 인간적 족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부의 의지와 인격에 의한 새로운 사제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사제직은 철저하게 이타적인 삶을 살다가 끝내 인간을 향해 몸바쳐 쓰러진 십자가 사건과 부활 안에서 완성되었다. 예수님으로부터 근거한 사제직은 존재 자체가 완전히 개입되지 않은 부분적 기능이 아니다. 이 사제직은 인간 전체와 타협없는 포기(마태19, 27)를 요구한다.
이 영원하고 완전한 사제직이 나에게 시작되었다. 아버님을 뒤로하고 성큼성큼 신학교문을 들어서던 날, 요란스럽고 자신있게 내가 하느님을 샀던 날이었다. 그러나 9년 후 짐을 들고 다시 그 문을 나서던 그 날은 하느님께서 소리없이 나를 사셨던 날이었다. 그것에서 주님은 나의 교만과 인간적인 욕심을 꺾으시고 빈그릇이 될 때까지 좌절과 용기를 교차시키셨다. 그 분은 내가 무미건조함으로 관성적인 생활을 할 때면, 하루의 첫시간을 봉헌할 때까지 나의 새벽잠을 흔들어 깨우셨다.
이제 주께서는 사람들이 당신께 맡긴 나를 다시 사람들안에 맡기셨다. 그리하여 가까워 질려고 노력할수록 심오한 주님의 손을 잡고, 겸손과 온유라는 수선의 도구를 차리고 세상을 향한 봉여사의 허리띠를 동역맨다. 오늘 온통「내」가 주제가 되어도 싫증내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온통「그리스도」가 주제가 되어도 싫증내지 않을 신비의 관리자로서의 첫발을 내딛는다.
그동안 나를 낳아 키워주신 부모님, 올바른 길을 걷도록 끊임없이 격려해주시고 도와주신 교구장님과 선배신부님들 그리고 신학교의 교수 신부님들께 온마음 다해 감사드린다. 아울러 성소후원회 회원들과 기도를 아끼지 않은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린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