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왜 있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수천년동안 변함없이 정의를 위한다는 것이었다. 개인의 인격적 완성을 추구하는 도덕적 선과는 달리 법은 공동생활의 질서를 담보하는 사회적 정의를 이념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정의란 무엇인가? 설명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개념이고 항상 추상적 개념으로 밖에 정의될 수 없는 말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바에 따라서 「사회가 공동의 선이라고 인정하는 가치」혹은 「각자에게 제몫을 주는것」이라고 쉽게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법이란 국민의 자유 평등과 행복을 보장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틀림이 없는것이다. 국민의 행복을 보장하기 위하여 법은 반드시 있어야만 되고 있는 법들은 또 반드시 국민의 행복을 지켜주어야만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놀랍게도 국민을 괴롭히고 불행하게 만드는 법들이 너무나 많다. 악명 높은 국가보안법 등 사상관계법률, 언론출판과 집회등에 관한 법률 그리고 재벌들을 보살피는 세법과 경제관계 법령들이 그것이다.
이법들 때문에 죽고 갇히고 빼앗긴 사람들이 그 얼마이며 이 벌들 때문에 나라를 원망하고 뜻을 잃은채 좌절된 인생을 마치는 사람들은 또한 그 얼마나 되었던가. 모두가 다정권에 도전하거나 체제를 비판위협한 사람, 가지지 못한 사람, 노동을 상품으로 팔아야 하는 사람 힘없고 배운것 없는 사람들이었다.
우리 법질서는 정권을 쥔 실력자와 많은 부를 축적한 자산가들 이른바 지배계급의 이익과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힘없고 가진것 없는 사람(민초)들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이러한 법들은 5·16혁명시에는 국가를 재건한다는 구실로 그리고 5공화국시절에는 국가를 보위한다는 핑계도 주권을 가진 국민의 의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아니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양산되어 나왔으며 민주화가 되었다고 공인하는 이 밝은 세상에서도 이법들은 멀쩡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정통성이 없고 권위도 인정받을 수 없는 실력자들이 멋대로 만든 법일지라도 그것을 적용하고 집행하는 기관들이 정의로울 때에는 그 폐해는 반감될 수가 있었을 터인데 우리는 법의 집행과정에서도 참을수 없는 부정의를 견뎌야만 하였다.
명령복종의 알아서 미리 기는 사법부가 이른바 정의를 이념으로 한다는 법질서의 모양을 아예 구겨놓고 말았다.
흔한말로「법대로 하겠다」고 하면 억울함이 풀리고 살기가 좋아진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제 죽었구나하고 겁을 먹는 세상이었다.
어떻게 해야 이같은 부정의와 암흑에서 벗어나 정의가 구현되는 나라를 만들수 있겠는가?
이에 대한 답안도 자명하다. 우선 권력욕과 명예욕에 찌든 정상배, 한몫 잡으려는 무식한 명사들을 법만드는 국회로 보내지 않아야 한다.
행정 사법 언론 등의 기관에서 실력을 쥐고있는 소신없는 눈치파·아부파와 무사안일파들을 가려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국민이 더 알아야 하고 또 더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
동유럽제국들의 혁명적 변화를 보면서 결국 공산주의는 망하는 것이라느니 우리의 주의와 체제가 우월함을 보여준다느니 하는 궤변을 진리고 받아 들이는 어리석은 백성,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사람죽이는 주의라고 털고 일어서는 무식한 국민이 되어서는 안된다.
개인적인 명예욕과 치부를 염두에 두고 애국자라고 외치는 사람과 일편단심 나라와 사회를 진심으로 염려하며 자신을 돌보려하지 않는 사람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법의 정의는 국민의 투쟁으로서만 확보될 수 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영국의 의회민주주의도 불란서의 시민적 자유와 권리도, 그리고 미국의 독립과 번영도 모두 각성된 국민들의 줄기찬 투쟁으로 얻어진 것이었다.
공짜로 굴러온 8·15해방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으며 남의 나라의 책을 보고 베껴다 만들어 놓은 우리헌법의 기본적 인권이라는 것이 과연 무슨 구실을 해왔는가를 돌이켜 본다면 자명하여질 것이다.
남북분단이라는 역사적 민족적 모순, 반공이데올로기에 의해 경직된 탄압의 영구화를 가져왔으며 헌법의 자유와 권리는 교육용 장식용으로 법전 속에 갇혀 왔었다.
끊임없이 이어진 민주화를 위한 민중의 운동과 희생들이 모아져 6·29선언이라는 개선의 변혁을 가져왔고 허리띠를 졸라맨 근로자들의 노조투쟁이 경제적지위의 향상, 직업환경의 개선을 이루어가고 있지 아니한가.
정의로운 법을 만들고 정의롭게 법을 집행하며 그리하여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할 최종적 책임은 이일들을 수행하는 정치지도자와 공무원들을 선출하고 통제·감시하는 국민에게 있다.
부정의에 무관심한 국민, 알고도 방관만 하는 국민, 투쟁을 겁내는 비겁한 국민에게는 결코 정의가 주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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