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님을 한해 한두번 뵈온것이 내게는 다시 없는 정복(淨福)이라 생각된다. 허둥대느라고 올해에는 묵은 세배도 못갔기에 음력설에는 꼭 가야지 마음먹고 있었던 터였다.
오련한 미색 누비저고리에 은옥색 치마를 입으시고 조용하고 인자한 미소로 맞아주신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간곡한 기구를 막 올리신 뒤처럼 청순하고 단정해 보이셨다.
『며느님을 또 보셨다고. 어디 색씨유?』
『평안도 애예요』
『평안도 색씨면 어글어글하고 씩씩하다우. 서울 사람같이 오종종하지 않다우. 통도 크고 시원시원하지』
『시모님께서도 근력이 좋으시우』
『어머님께선 손녀사위 잘보실 생각뿐이시지요』
『어련히 당신께서 알아 점지해 주시겠수! 나 아는 데레사두 서른넷에 맞갖은 신랑을 만나 떡두꺼비같은 아들이 벌써 둘이라우. 참 미국간 큰 아드님은 잘 있다우? 어쩜 그렇게 말두 구수하게 잘하구 구염성스런지』
말수는 적으셨지만 정답고 고운 마음씨를 곧 느낄수 있었다. 무엇이고 좋은 점만 보시고 믿음으로 좋게만 돌리시고 사랑으로만 보시는 것이었다.
작은 따님을 잃으셨을 때 위로해 드릴 말씀이 없었다. 어쩜 이 어진 분들에게 하느님은 왜 이다지도 호된 아픔을 주실까! 난 몰라요. 난 몰라요! 이렇게 혼자 종알대고 있을 때였다.
『내가 기도를 제대로 잘드리지 못한 죄인가보우. 날 데려가시지. 저 어린것들을 어쩌지』
설마 하느님이 이 착한 마님에게 무슨 벌을 내리실게 있으시다고 그렇게 슬픔을 주셨을라고. 어질고 고운 그 따님을 더 이상 이 속세에서 시달리게 두시기 안스러우셔서 당신 곁으로 데려가신 것이겠지. 속으론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말문은 열리지 않아 고개만 숙이고 훌쩍일 뿐이었다.
언젠가 마님을 모시고 잔심부름하던 갓난인가 하는 색시가 있었다고 한다. 부러움이 순간적으로 마음을 돌게 하였던지 은수저며 가락지 등을 보따리에 싸놓고 갑짜기 나서더라는 것이다. 마님 눈에 그녀의 검은 마음이 비쳤을지 나는 모른다. 어쩜 아셨을지도 모른다. 아는 것과 용서하는 마음은 그분에겐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라면 안 뒤엔 용서가 없고、 섭섭과 분풀이가 의례 따르기 마련이겠지만.
『그동안 잘 도와줘서 고마와. 이거 별건 아니지만 내정표니 받아두어. 그리고 어디 가서라도 건강하게 곱게 잘만 살아. 그동안 애 많이 썼어. 고마와』
마님의 티없는 사랑에 갓난이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며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는 말씀을 전해들은 적이 있다.
모두가 기쁨에 웃을 수 있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나라를 세워 보시겠다고 갖은 애를 쓰시다 가신 영감님 뒤에서 그분을 받들고 돕고 이해하며 한가지로 이 겨레 위해 시름하고 기구하며 침남매를 키워오신 마님. 영감님을 여의신 뒤로 건강이 허락하실 동안은 늘산소에 가셨다는 마님. 아드님 한분과 따님 한 분을 성직자·수도자로 바치시고 그들이 혹시나 헛디딜세라 꿈속에서도 기구하셨을 마님. 걸리실 때는 그 몇번이셨을까? 두 분인들 구미구미 그 어머님이 얼마나 또 못잊히셨을까?
머슴살이를 하면서 어머니를 손수 봉양했던 진정사(眞定師)의 이야기를 다시금(되새기게 된다. 「효도 다한 뒤에는 머리 깍고 불도(佛道)를 배우겠습니다」
『불도에 들기란 쉬운게 아니란다. 어미야 집집마다 다니기로 입에 풀칠못하고 옷이야걸치지 못하겠느냐?』하며 의상대사(義湘大師)의 설법을 듣고저 한 아들을 출가케 한어머니. 차마 떨치고 가지 못해 머뭇거리던 사람의 아들의 아픔을 또 생각한다.
십자가에 조촐한 꽃 한다발이 얹혔을뿐인 관(棺). 추기경님을 비롯한 여러 신부님들의 애도와 기구속에 성음악의 연주로 거행된 장엄한 장례미사 마지막엔 부활의 가락이 고즈넉히 기도처럼 울렸던 미사. 마님의 포근한 사랑을 느꺼워하는 이의 울음속에 행해진 조용한 미사.
한 평생 의지하고 사시다가 긴세월 그리시던 님의 곁에 이제 눕게 되신 것이다. 못내 그리워 돌아서는 발길마다 허우룩 하셨을 그 길을 이제당신을 사랑하는 여러 사람에게 당신을 마직막 울게하시고 묻히시다니 그 고운 낯을 차마 흙으로 가리우다니.
『…마리아가 뜻밖에 지은 죄에 대해서도 너그러이 용서해주소서』하시는 조용하고 떨리는 아드님의 마지막 기도는 무딘 마음조차 뭉클게 하였다.
고 운석 장면박사님의 미망인 김옥윤(마리아)님께서 가시던 날 그날따라 눈이 푸짐히도 나렸다. 고운 마님의 마지막 길이라 하늘도 횐꽃잎을 흩뿌리시는가 보다고 누군가 중얼거렸다. 『꽂아드리려고 거북모양 선물도 마련했었는데 너무 섭섭해서 막 울었어요. 그분은 우리모든 신부와 수녀들의 어머님이 셨지요』
믿음속에서 바르고 곱게 다사롭게 사시다간 마님을 본답고 싶은 간절한 기구속에 산을 내려왔다. 눈이 많이 오면 풍년이 든다던데、 가실 때도 이 겨레에게 복을 비시고 가시는 걸까?
『…고맙습니다. 이 겨레에게 깨끗한 복을 주십소사. 가엾은 이 겨레에게 궂은 일일랑 주지마옵시고 어루만져만 주옵소서』
마님의 마지막 기도를 상상해본다. 주무시듯 고요히 며느님께 안겨돌아가셨다는 마님.
긴 긴 한 세상을 믿음과 사랑과 인고 속에 곱게 따뜻하게 꽃피우다 떠나는 아름다운 해넘이를 생각하며 두손을 모은다.
○…지금까지 집필해 주신 김현태신부·양상렬씨·박영씨께 감사드립니다. 이번호부터는 정양완씨(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오재호씨(방송작가)신은근 신부(마산교구 교육국장)께서 수고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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