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가 모 본당에 피정지도 갔을때 신자들이 과연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는 지를 물어 본 적이 있었다. 대답은 놀랍게도 어떤 형제 두 분과 자매 몇분이 매일 가정 기도를 바치고 있다는 응답이었고 할머니 할아버지 편에서는 아예 단 한분도 없었다.
아마 쑥스러워 그랬을 것이었다. 설마 그 많은 신자들 중에 가정에서 함께 기도 바치는 자들이 그렇게 없었을까마는 다른 한편 어쩌면 그것이 솔직한 우리 신자들의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목자로서 그 책임을 통감한 일이 있었다.
기도를 흔히 「하느님과의 대화」 라고 했을 때 가정에서 기도가 없다는 것은 대화가 없다는 것이며 대화가 없다는 것은 참된 만남이 없고 친교가 없다는 것으로서 그 가정이 얼마나 팍팍하고 고달플까 하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나이 드신 어떤 자매가 있는데 아주 열심하신 분이다. 남편 몰래 헌금도 많이 하며 하루에 기도 바치는 것도 이것 저것 합쳐서 줄잡아 두 시간은 족히 되는 분이다. 그런데 한 가지 흠은 가족들과는 함께 기도를 바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번은 그 자매에게 가정기도를 권하자 자기는 기도 바치는 종류가 많기 때문에 함께 바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그게 뭔 소리냐?』깜짝 놀란 내가 기도는 혼자서 백마디 바치는 것보다 가족들이 모여 함께 바치는 한마디가 훨씬 더 크고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자 그 자매는 코 방귀도 안뀌면서 자기는 자기 식대로 하겠다고 말문을 닫아 버리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참으로 이상할때가 많이 있다. 특히 열심하다는 신자일수록 자기 아집에 사로잡혀서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기뜻만 고집하고 있으니 대개 그런 가정에 냉담자가 많고 신앙의 사고뭉치들이 드글드글 끓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 인지도 모른다.
7ㆍ8년 전에 어떤 농촌가정을 방문했던 것을 나는 결코 잊을 수가없다. 그때도 지금처럼 바쁜 농번기였고 사람을 만나려면 밤 9시가 넘어야 하기에 시간을 맞춰 오토바이를 타고 그 마을에 당도하고 보니 뜻밖에도 그 집에서 성가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알렐루야!
내 생전 이런일은 처음이었다. 너무 너무 아름다운 충격이었으며 그리고 그 자체가 은총이요 축복이었다. 천사의 음악이 따로 없었으며 피곤한 농촌 가정에서 그 시간에 온가족이 성가와 저녁기도를 올리던 정경은 또 하나의 천당이었다. 기도가 끝나고 왁자지껄하며 자기들 방으로 돌아가는 그 모습까지도 작은 천사들이었다.
그 집은 식구가 많았다. 항상 누워있는 환자도 있었으며 농촌의 고달픈 문제들을 골고루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조금도 불행하지 않았으며 자녀들은 부모를 존경했고 부모는 또 자녀들에게 애정과 권위가 있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는 가정은 무엇이 달라도 정말 달랐다.
요즘 나라안이 돌아가는 모습들을 보면 거덜난 집안일처럼 여겨져서 남사스러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젊은 자식들은 그저 무법자요 행패꾼이며 어른들은 또 수수방관에다 혹은 한 술 더떠 그에 편승하여 놀아나고 있으니 잘못도 한참 잘못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철갑모에 방패를 들고 철벽을 쌓고 있는 모습이나 독기 서린 눈에 화염병을 들고 길길이 뛰는 모습들을 보노라면 저들이 정말 내 아들이요 내 동생들인지 섬뜩해서 말문이 막히며 어른들인 기성세대들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오늘의 난국에서 쉽게 읽을 수가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도 말이 많은 것이 흠이다. 그들에겐 귀가 없으며 그저 입만 가지고 남이야 듣거나 말거나 미친듯이 구호만 외쳐대고 있다. 그리고 소위 지성인들은 말이 또 너무 없는 것이 흠이다.
잘못된 젊은이들 앞에 왜 어른들이 입다물고 눈치보며 굽신거리는지 오늘의 가정교육에서부터 커다란 모순을 지니고있다.
사실 기도라는 것이 그렇다. 기도를 대화로 봤를 때 대화의 비결은 잘하는 것보다 먼저는 잘 듣는 것이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말을 해야 할때 입을 여는 것이 참 대화, 좋은 기도가 될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저쪽은 귀머거리요 이쪽은 벙어리로서 대화가 꽉 막혀 있으니 나라 전체가 온통 숨막히는 답답함과 짜증으로 가득차있다.
우리는 지금 민주화와 통일을 향해서 긴 터널을 지나가고 있다. 밤은 길이도 새벽은 오듯이 오늘의 흔란과 무단 폭력의 사태는 언제고 지나가는 것이다. 성서를 보면 인간으로서 내려갈 수 있는 최악의 길, 절망의 길이 바로 하느님의 은총을 만나는 결정적인 시기라는 사실에 우리의 희망이 있고 미래가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 겸허한 자세로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자. 특히 가정기도를 바치는 지혜를 배우자. 하느님을 두려워할줄 아는 가정에서 자녀는 참 사랑을 배우며 부모는 또 거기에서 깊은 존경과 위업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점진적으로 나라를 구하고 세상을 구원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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