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살랑대고 햇살이 뜨락을 뒹굴며 낭자한 웃음을 뿌려놓던 지난 봄날 오후 난 모자 하나 챙겨 들고 집 뒤 야트막한 등성이에 올랐다.
내 님이 선사하신 비단같은 봄날을 만져보고 냄새맡고 온 몸에 부벼보며 두눈으로 흠뻑 취하고 싶어서였다. 길 동무가 없어도 좋았고 봄볕에 새까맣게 그을려도 좋았다.
그 옛날 어릴적, 시골에서 듣던 노고지리 소리가 들리는듯, 보리밭 이랑이 물결처럼 일렁이는듯한 착각으로 혼자서도 행복했다.
이곳 등성이 주위의 밭 자락은 앞으로 아파트가 들어설 곳이라는 표시로 흰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지만 골골이 나 있는 밭둑엔 냉이와 쑥들이 땅의 정기를 받아들여 싱싱하고도 탐스럽게 오로지 하늘을 바라 피어 있었다. 난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두 손가락으로 쑥을 뜯어 잠바 양쪽 주머니를 잔뜩 부풀리며 뺨을 스치고 달아나는 달콤한 봄의 향기를 마음껏 사랑할수 있었다.
얇은 떨림같은 제비꽃이 지천으로 피어있고 소박한 향기로 어렸을적 날 사로잡던 찔레덤불도 있었다. 초여름 어스름 저녁녘의 찔레꽃 향기는 얼마나 달큰하고 아리운 것인지! 드문드문 보이는 나물캐는 여인네들의 정경은 세상 살이의 고됨과 갈등으로 부터 내 안의 이기와 물질만능의 허상으로부터 등을 돌려 앉은채 그지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돌아오는 길에서 만났던 할미꽃 무더기는 높다란 산 언덕에서 하얀 머리칼을 날리며 막내딸을 부르다 숨져간 어느 옛 할머니를 생각케해 콧날이 시큰하도록 서럽고 반가웠다. 퍼질러 앉아 목놓아 울고싶은 설움이 우럭 치올랐다. 정말 몇년만에 만나 보는지 헤아릴수 조차 없었다. 기억속에서만 피어있던 할미꽃을 한 두송이가 아닌 무더기로 만날수 있었음도 여린 내 마음을 가장 잘 아시는 내 님께서 선사해주신 선물임을 내 어찌 모를까!
늘 조그만 그리움으로 남아 있었기에 난 내년에도 후년에도… 이 할미꽃 무더기를 찾아올것임을 안다.
집안에서 유리 너머로 바라보던 봄날 언덕, 생각속에서 바라보던 등성이는 내가 한 걸음 내 디딤으로써 비로소 살아 움직이고 살가운 속삭임으로, 수줍은 처녀의 살풋한 웃음으로, 사랑하는 내님의 포옹같은 열정으로 날 껴안아 주었다. 그것은 환희인 동시에 알지못할 슬픔으로 내게 왔고 붙잡을수 없는 안타까운 세월의 서러움이기도 했다. 한편의 서정시처럼 살고 싶었던 꿈은 한해 두해가 가면서 자꾸만 마모되어 가지만, 이제는 연습해 볼수없는 「살이」에 이름을 불러주고 싶고 의미를 부여하며 사랑하고 싶을 뿐이다. 바람과 햇살과 연녹색의 나뭇잎과 깔깔거리는 웃음과 서러움, 눈가의 잔주름조차 사랑하면서…. 올 봄에도 어김없이 앓아야했던 봄 스물스물 내 몸을 기어오르며 피어나던 한자락의 봄, 증후로하여 안으로 밖으로 앓아대던 아픔, 이 마저 사랑하리라. 아니 철저하게 앓아야 하리 사랑하는 내님이 곳곳에 수놓은 찬란한 그 손길을 생각하면서, 세상의 아픔에 가슴적시며 한껏 울어볼수 있음도 축복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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