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善) 의 확산」으로 아름답게 창조된 세계가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으로 갈기 갈기 찢겨져가고 있는 지구의 얼굴모습에서 창조질서 보존운동이 「한 마음 한 몸」운동 생활실천부 주관으로 종파를 초월하여 힘을 모으고 있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불과 2~3년 전만 하여도 우리가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아니했던 우리 주위의 환경들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모든이들의 지대한 관심을 끌지 않을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자연 파괴현상이 일어나게된 원인은 과학 소산의 쓰레기들과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행복론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란 잘못된 공리주의 사고에서 연유한다고 하겠다.
미국의 화이트 교수는 과학자들 앞에서 「스스로의 보금자리를 그처럼 형편없이 더럽히는 피조물은 인간들 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그 구제 방법은 본질적으로 종교적 방법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오늘의 증가하고 있는 세계 환경 파괴의 현상의 요인을 두 가지로 보고 있는데, 그 하나는 동력기술과 과학의 산물이요 다른 하나는 유대-그리스도교 (Judeo-Christian) 신학 이론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이 신학이론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과 자연의 이원론 (Dualism)을 확립했을 뿐아니라, 인간이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자연을 이용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연은 인간에게 봉사하는 것 이외는 그 존재이유가 없다」라는 잘못된 가치관을 우리가 거부하지 않는 한, 우리 지구촌의 생태위기는 계속 악화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성프란치스꼬를 생태학자의 수호성인으로 추천했다.
오늘의 사회는 첨단 기술의 발달로 선진국 사이에서도 경제적 경쟁관계가 심각해지고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연 애호가들은 과학과 기술문명의 비인간화와 자연 파괴 현상을 보면서 「자연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러한 외침은 과학적 기술의 악용과 폐단을 제거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대에 과학과 기술은 인간의 요구에 필연적으로 요청될 수 밖에는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생활조건을 위해서 과학과 기술을 이용하는데 아무 제한없이 자유로이 하고 싶은대로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과학과 기술의 이용은 이제 인간만을 위해서 요청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여지껏 과학과 기술의 발달의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인간의 피조물 가운데서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척도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 인간중심의 생활태도에서 벗어나 다른 피조물의 권리와 생명이 존중되는 생태학적 균형이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과학과 기술은 개발되어야 할것이다. 즉 인간의 탐욕과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가치 구현을 위해서 이용되어야 할것이다.
1979년 11월 29일 교종 요한 바울로 2세는 자신의 사도적 서한인 「Inter sanctos praeclarosque viros」를 통하여 생태학자의 주보 성인으로 성프란치스꼬를 선포하셨다. 그리고 1988년 회칙 「사회적 관심」에서 「무턱댄 산업화의 결과들」에 대한 비중있고 진지한 경계(警戒)의 태도를 나타내었다. 2차 바티깐공의회 (1962-1965)가 막을 올리려던 무렵인 1960년도에 벌써 현대 과학 기술의 부정적 영향이 확실히 드러났지만 이 문제에 대하여 교회는 민감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이 최근의 역사적 사실이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 수십년 동안 로마에서 발표된 산더미 같은 문서 중에서 환경문제에 대해서 언급된 문서를 찾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 발표된 글속에서, 제2차 바티깐 공의회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해석에서 인간 중심적 경향이 짙으며 자연세계는 인류가 독점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지배신학을 지지하고 있다는 비판적인 내용을 볼 수가 있다.
자연보존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발달한 과학과 기술이라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우리의 생태 위기를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우리는 먼저 자연과 인간관계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가치관을 올바로 정립하여 자연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켜나가야 하지 않을까? 자연과 인간에 대해서 이원론적인 사고를 제공했던 유대 그리스도교적 자연관은 재고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점에 대해서 화이트교수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새로운 종교를 발견하거나 아니면 우리의 옛 종교에 대한 재고(再考) 가 있어야 할 것이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모든 자연의 영적 자율성을 주장했던 지극히 종교적이면서도 자연주의자였던 성프란치스꼬(1182-1226)라는 13세기의 한 종교적인 인물에게 관심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다. 그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가치관을 제시하였다. 그는 『인간은 피조물에 대해 무한한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는 기존의 생각에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모두 평등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함을 깨우쳐 주었다. 그는 우리에게 자연에 대해 가장 영감적이고 혁명적인 생각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우리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과 하느님의 뜻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느낄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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