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인간의 역사안에서 역사를 통하여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인 믿음이다. 이 말씀을 외면할 때 예수께서는 「우리가 피리를 불어보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오 11.17)고 나무라신다. 우리 교회를 보고는 무어라실까? 한국 교회를 들먹인다는 것이 주제넘다 싶지만 하는님 백성이 한사람으로서 의사를 밝히는 것도 의미있겠다싶어 용기를 내어본다.
역사 안에서 역사를 통하여 피리소리, 곡소리가 울려 왔을때 우리 교회는 선뜻 화답하여 춤추고 가슴을 쳤는가? 박해시대의 초기 교회, 종교 자유를 얻고난 중간 시기, 1970년대 이후 최근 교회의 반응이 크게 달랐었고, 제대로 신명을 내었는가 그렇지 못했는가가 교회의 생명력을 결정적으로 좌우하였던것 같다.
초기 교회는 생각만 하여도 신바람이 난다. 우리 선조들은 세계 교회사에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놀라운 방식으로 산교사의 도움없이 복음을 스스로 찾아 맞아들이고 성직자도 없이 교회를 창서하였다.
그리고 1세기에 걸친 박해동안 숱한 순교자를 내면서도 이땅의 민중가운데 굳게 뿌리를 내렸다. 이 놀라운 생명력은 어디에서 왔을까? 민중의 열망과 맞아떨어진 신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일진왜란으로 삶의 기반이 쑥대밭이 된 이래 민중의 신음과 몸부림은 교회설립시기에는 조선 사회를 지배해 오던 유교주의적 신념체계를 뒤흔들고 있었다.
전통적인 신분 질서를 무너뜨리기 시작하였고, 농업 생산력의 향상을 기져 왔으며, 상업자본을 형성하기에 이르면서 신학운동을 불러 내었다. 이 민중의 열망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였으며, 복음은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 의식을 강조함으로써 이제는 민중의 열망을 창출하는 동력이 되었다. 엄격한 봉건적 계급사회에서 지배 계급인 양반 선비들이 스스로 기득권을 포기하고 하층 민중과 더불어 외래 종교를 받아들인것은 혁명적 변화였지만 박해의 시기가 오자 양반님네들이 슬금슬금 떨어져 나갔을때 민중이 주축이 된 교회가 한갖 종교운동에 그치지 않고 한결같이 민족사회의 개혁 담다자로 살아 있었음은 더욱 놀라웠다.
그러나 한쪽으로는 신명을 죽이는 기류가 드세어지고 있었다. 우선 외적으로 교회에 대한 지배세력의 집요한 탄압이 이 감당키 어려웠다. 이미 봉건 질서는 민중의 열망을 담을 수 없어 무너지기 시작하였으나 지배 집단은 개척에 나서기는커녕 더욱 반동적으로 민중을 탄압하여 가시적 개혁세력인 가톨릭 교회가 표적이 되고 있었다. 내적으로는 교회가 전적으로 외국 선교사들의 지도에 맡겨져 있었으니 그들이 어찌 이땅의 민준의 열망을 제대로 읽을수 있었으랴.
차츰 신앙은 개인주의, 현실도피주의, 내세주의로 기울고 서양 문명 선망에로 빠져들게 되었다.
1880년대에 이르러 일본및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세력이 한반도로 진출하면서 교회는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된다.
이 시기 교회는 외적인 억압의 굴레를 벗게 되었으니 심기일전하여 다시 피리소리에 귀기울여 춤을 춰야했을텐데 엉뚱한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어걸고 자진하여 민중의 열망을 외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민족사의 격동기에 우리 역사안에서 구세사적 역할을 도시해내질 못하였다. 그 무렵 한짝했던 근대 민족국가 수립의 기회 앞에서, 일본의 참략과 식민지 지배 앞에서, 교회는 조선 민중의 처절한 몸부림을 최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배 세력에게 알게 모르게 협조하기까지 하였다. 집단 이기주의적인 소극적 자아보호의 태도는 자연 체제 옹호적이고 보수적이게 마련이었다. 이흐름은 1945년 이후에도 이어져 민족 분단에서도, 민족상잔의 전쟁에서도, 4ㆍ19혁명을 잣밟고 일어난 5ㆍ16쿠테타 앞에서도 집권세력을 두호하는 보수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민중의 열망을 외면한 교회는 민중으로부터 잊혀질 수밖에 없었으며 한국교회는 소극적 신앙과 역사적 무력감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70년대에 들어와 교회는 다시 피리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민중이 부는 피리소리가 워낙 높아 있었다. 4ㆍ19이래 청년 학생들의 민주화를 향한 열정은 줄기차게 이어졌으며, 노동자 농민은 한국사회에서 확실한 계층으로 자리잡으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한편 교회도 선교사들의 손에서 지도력을 넘겨받아 상당히 자주적으로 응답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평신도들도 상당히 성숙하여 있었다.
진취적인 신자들과 일부 성직자들이 앞장서 독제 체제에 항거하기 시작하였고 끝내는 교회적인 신명으로 번졌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 오면서 70년대의 신명이 흔들리고있다. 선교2백주년이다, 성인탄생이다, 교황 방문이다, 세계 성체대회 개최다 하여 부품한 행사들을 벌이고 자축에 들뜨면서 다시 민중의 열망을 외면하는 징조가 완연하다. 70년대를 이어 80년대 초반 군사 독재와 정면으로 대결하였고 87년 6월 대행진을 추동해 내는 역할을 맡는 모습도 보여준다. 그러나 민주, 자주, 통일을 갈망하던 민중의 열망이 80년대말 통일운동으로 분출되어 구체적인 사건으로 피리 소리를 드높여 왔을 때, 우리는 교회적으로 끌어 안기를 거절하였다.
80년대의 폭발적 신자 증가율이 90년대 중반부터 급격히 떨어지리라는 예상을 앞에 놓고 교회는 「가격 상승이 예상되는 교회 부지와 건물이 대한 투자, 사제 양성과 교도권 확립 등에 주력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 이것은 민중의 열망이 불러대는 피리 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자세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제대로 신명을 내자. 민중의 사랑만 받는다면 땅ㆍ집ㆍ사람은 절로 따라오는 묘리를 살아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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