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중 다행하게도 목공소에 다니는 한 친구를 우연히 알게되어 문짜는 일을 배우게 됐다. 내 적성에 맞는 것 같아 부지런히 배웠다. 하느님은 까맣게 잊어버렸고 생각조차 나지않았다. 그 당시 남묘호랑계교에 다니는 친구가 자기교를 믿으라고 설교를 할때면 「그런 교를 믿을바엔 하느님을 믿겠다」고 하면서도 내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조차 생각하지 않았다.
1968년 2월 나는 군에 입대했다. 눈물을 글썽이며 허리춤에 꼬깃꼬깃 숨겨두었던 몇푼의 돈을 내손에 꼭쥐어 주시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군생활도 비뚤어진 성격 때문에 결국 사고를 저질러 자대영창, 헌병대, 육군교도소를 전전하며 온갖 고통과 구타를 당하며 지옥속에서 보냈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를 얼마나 울려드렸는지…. 가끔 어머니와 성당에 가는꿈, 어떤때는 신부님이 보이기도 하고, 복사하는 꿈을 꾸기도 했지만 난 하느님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렵게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와 다시 목공소에 들어가 일하게 되었다. 29살이 되었을 때 우리 어머니를 극진히 보살펴 주는 한 여성을 알게되었다. 그런데 그 여성은 하필 남묘호랑계교란 교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하느님을 까맣게 잊고 있던 나로서는, 무슨 교를 믿든 그런건 상관이 없었다. 다만 어머니께 잘한다는 그것하나면 되었다. 그래서 며느리에게 매일 당하기만 하고 화병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모시기로 합의, 부산영도 어느 언덕에 조그만 방을 얻었다. 어머니를 모셔올려고 했지만, 큰형님과 의견충돌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고보니 그곳에 더 이상 있기가 싫었다. 아니 부산이 싫어졌다. 그래서 아내의 권유로 그당시 장모님이 사시는 경북 영주로 가서 살게되었다. 그리고 약8개월 후에는 첫아들을 낳았다.
부산에 계시는 어머니께 연락을 드렸더니 불편한 몸으로 부랴부랴 올라오셨다. 『내 새끼 어디보자』하며 좋아 하시는 어머니가 부산으로 돌아가신지 3개월후에 잠깐 외지로 일하러 갔다가, 돌아와보니 4일전에 도착된 전보가 와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였다. 형수님으로 또, 나로 인해 고생만 하시다 결국, 화병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나는 결국 어머니 장례에도 참석못한 불효 막심한 존재였다. 그리고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어머니 장례때 많은 신자들이 줄을이어 연도를 바치고 양산천주교 묘지에 안장될때까지 자기일처럼 처리해 주시는 신자분들을 보고, 그동네 많은 분들이 성당에 나가게 되었고, 특히 놀라운 일은 큰형수님이 모든 것을 뉘우치고 하느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1976년 영주에서의 생활이 신통치 않자 경기도 송탄으로 이사를 갔다. 거기서 준미ㆍ준임 두딸을 낳았다. 그러나 역시 생활이 어려웠고 빚만 지고해서 중동으로 가기로 결심, 아내와 어린아이들을 남겨두고 1981년 1년계약으로 쿠웨이트로 떠났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