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장만한 대자리를 마루에 깔고보니 한결 시원해 보인다. 삼베 훗이불 다섯개 정도를 합친 크기만한 이 대나무 자리는 전라도 담양에서 만든 것으로 담양은 예부터 대나무숲과 죽세품으로 이름난 고장이다.
이 대자리를 굳이 삼베 훗이불에 비교하는 것은 그 감촉이 삼베 이불처럼 서늘하기 때문이며 그 넉넉함이 어린 옛시절의 여름날 풀먹인 삼베옷을 입은 소박한 이웃사람들의 마음과 닮았기 때문이다.
내가 서둘러 본래의 초석자리를 걷어내고 더 크고 때깔나는 대자리를 마련하고 또 화문석을 다시 손질함은 이번여름은 다른때와 무언가 다른 것 같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아이들과 오손도손 함께 지내는 것도 이번 여름이 이제 끝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그리고 이번 여름에는 반갑고 귀한 손님이 자주 집에 찾아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아이들은 타관에 나가있고 그들은 곧 집으로 모두 돌아올 것이다. 아이들은 필시 독한 타관 밥 때문에 살이 내려있을 것이고 또 갈증같은 것으로 조금은 지쳐있을 것이다.
돌아온 아이들은 우리 곁에서 목마름을 풀고 새 힘을 얻을 것이며 또 떠나갈 준비를 할 것이다. 그 잠시 머무는 나날들, 어쩌면 나는 이 날들을 위하여 여름채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대자리 위에 앉아 냉수 한그릇 머리맡에 두고 뜨락을 내다본다. 담밑에 서있는 시나리 댓가지가 바람에 흔들리운다. 그 야윈 몸짓이 살이 붙지 않는 아들 아이의 모습과 같다.
담을 휘덮고 있는 인동초 넝쿨 밑에는 풀이 수북하다. 그곳에는 뱀딸기, 달개비 풀, 돌미나리 같은 것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고 있으리라. 이 여름 풀들은 해마다 우리 집 마당가에서 돋아나와 강인하게 생존을 주장하고 있다. 참으로 경이로운 생명력들이다.
문득 올 여름은 집을 떠나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도시의 뜨거운 여름 열기,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피곤한 일상의 소리들을 피하여 푸른 바닷가를, 산사의 계곡을 찾아가 보고 싶다.
지난날, 우리는 참 많이 여름 나들이를 했었다. 짙푸른 동해바다, 낙조가 아름답던 남해바다, 우리는 그 바닷가의 밤들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원색의 옷을 입은 아이들을 앞세우고 그 아이들보다 더 가슴을 설레이며 바다로 떠나던 그 여름 아침들, 그때의 흉내를 다시 한번 내어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바닷가에 넘쳐날 인파와 산 계곡마다 흘러내릴 사람의 소리들은 결코 휴식이 될수 없으며 오히려 곤욕임을 깨닫는다. 이제 우리의 열정은 사라지고 마음이 늙어버린 때문일까. 그렇지만 그 이유 때문만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기다림 때문이다. 서늘한 바람이 일고있는 산능금 나무 밑에서, 해지는 시간에 올려다 본 고독한 하늘 밑에 서서 나는 집에 돌아올 나의 아이들과 손님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흰 모시 두루막 같이 맑고 서늘한 마음으로 우리집 문전에 들어설 귀한 사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대자리 위에 이리저리 놓은 태극선 부채, 여섯마리의 금빛 학이 나래짓하는 화문석, 그 화문석 위에 푸른 풀밭처럼 펼쳐진 여름 훗이불, 냉수에 띄운 오이 냉국이며 찬물 김치, 이런 것의 준비는 매우 신명나는 일이며 또 무더위를 식혀주는 한줄기 바람과 같은 기쁨이 되기도 하다.
어쩌면 한번쯤 아이들과 함께 팔공산 자락에 숨어있는 한티 마을의 순교자 유적지에 다녀오고 싶다. 지난 여름 문득 가본 그곳의 기억이 아쉽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산비탈에 서있는 나무 십자가를 앞에서 증거하는 자의 삶과 의지를 이야기 하고 그 산속에서 샘솟는 생수를 갈증난듯이 마셔댔다.
인생의 몸마름, 끝남과 만남의 시작, 축복과 웃음, 그리고 헤어짐의 쓸쓸함, 이런 생활의 질서는 삶의 도처에 깔려있고 그 이치의 깨달음은 하나의 은총인지도 모르겠다.
이 여름, 우리집에 귀한 존재로 찾아온 대나무 자리, 나는 이 큰 자락 위에서 귀한 손님을 기다리며 한여름의 더위를 물리치고 싶다. 그 기다림은 바로 기도하는 마음 그 자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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