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이 시작된다. 말 뜻은 거룩한 일주일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이 주말에 재연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든이에게 거룩한 주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주님의 사건에 동참하는 자에게만 가능하다.
죽음의 동산 게쎄마니에서 그분이 그렇게 괴로워하신 이유는 어디에 있었겠는가.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질문에 대한 깨달음을 가져야 한다.
죽음 자체의 공포 때문이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답변이 되지 않는다. 순교자들의 경우엔 그보다 더한 상황에서도 기쁘게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분으로 하여금 죽음의 잔을 거두어 주실 것을 청하게 했겠는가(마르꼬 14,36).
로마 근교의 옛 길가에 「궈바디스」성당이 있다. 작고 오래된 성당이지만 순례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것은 「궈바디스(어디로 가십니까)」라는 말때문이라 했다. 이 이름이 부쳐진 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초대교회가 로마를 무대로 선교활동을 하던 시절 로마의 대화재가 발생한다. 사학자들은 그 화재를 황제 네로의 탓으로 돌리기도 하지만 당시 사회는 기독교인들의 방화로 간주하여 박해의 구실로 삼는다.
당연히 베드로의 체포가 명령되었고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를 숨기는데 헌신하였지만 오래 지탱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로마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가 로마를 떠나는 이유는 단 하나, 자기가 죽으면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무너진다는 신자들의 충언을 받아들인 것뿐이다.
로마를 벗어나는 지점에서 그는 불타는 로마를 향해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묻는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네가 떠난 로마를 위해 다시 죽으러 간다』. 그말에 깨달음을 얻은 베드로는 돌이와 순교하였고 주님을 만났던 그 지점에 지금의 궈바디스 성당이 세워졌다고 한다.
『우리는 죽어도 되지만 당신은 살아서 교회를 지켜야 합니다』. 이 말은 초대교회 신자들의 애정이었지 주님의 뜻은 아니라는 말이 된다. 교회를 지키고 인도하시는 분은 그분 자신이지 베드로는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의 때가 왔을때 순순히 물러나 교회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 베드로가 깨달은 궈바디스의 교훈이다.
처음의 얘기로 돌아가자. 게쎄마니의 예수님을 사로잡았던 고뇌는 무엇이었겠는가. 그분 역시도 베드로의 경우처럼 죽음 자체보다 당신의 죽음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인간적 판단이 그 원인이었던 것 같다. 즉 당신은 살아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가져와야 하는데「아버지 왜나를 죽음으로 몰아 부치십니까」하는 기도가 게쎄마니의 고뇌였던 것이다.
성주간이 진정 교회의 「거룩한 일주일」이 되기 위해서는 게쎄마니의 주님처럼 자신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을 찾는 성직자들이 많아져야 할 것이다.
성주간이 참으로 사회를 「거룩하게 하는 일주일」이 되기 위해서는 궈바디스의 베드로처럼 자신을 거름으로 생각하는 신앙인들이 많아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와 사회는 내가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는 느낌이 든다. 그래 그런지 성주간도 거룩한 일주일은 커녕「귀찮은 일주일」로 하락되어가고 있다.
사실 우리 주변엔「내가 없으면 망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정치가들은 정치가들 대로, 사업가들은 서업가들 대로 모든 분야에서 이러한 외침은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교회에서까지 이러한 외침이 들린다는 것은 우스운일이다. 교회는 사람의 힘으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뜻으로 움직여 진다는 것은 조금만 묵상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성주간이 귀찮은 교회행사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성주간의 영성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게쎄마니의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분의 죽음에 동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한편 성금요일의 의미를 모르면서 부활절의 기쁨에 참여한다는 것은 일시적 감정적 차원은 될지언정 그 이상은 어렵기 때문이다.
교회의 성주간이「신자들의 거룩한 일주일」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부분을 끊는 연습이 선행되어야 한다. 성 토요일 밤 신자들의 세례 갱신식은 그런 의미에서 성주간의 하일라이트이다. 끊지 않고서는 주님의 부활에 동참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궈바디스의 주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셨기에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건 베드로사도에게 있어서 또 한편의 너무나 많은 우리사회에 금년의 부활절이 새로운 궈바디스 사건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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