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감나무 잎새 위로 후둑후둑 가을비가 내리던 날、모처럼 방문한 작은 시골 본당의 만종에 취해 있을 때였다. 조그만 본당 사무실을 요란스럽게 가득 채우며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전화를 받고난 후 신부님께서 눈빛을 모우며 나에게 물으셨다.『지옥이 있다고 믿습니까?』의아해하며 머뭇거리는 나에게 신부님은 설명이라도 덧붙이려는 듯이 입속말로 나즈막히 말씀하셨다.
『암으로 고생하시던 분이 돌아가셨다니…그래、지옥은 있습니까? 없습니까?』물음에 대한 대답은 간결 하지만 왠지 신부님앞에서는 「예」와「아니오」는 천근의 무게를 갖고 내게로 다가왔다. 지옥이란 단어 앞에 나는 더듬 거리기시작했다.
어린시절에 배웠던 것처럼 기름 가마가 끓고 불구멍이가 이글거리는 곳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부재、그것이 곧 지옥 아니겠느냐며 얼굴에 홍조를 띤 채 설명하자 나의 더듬거림이 지나쳤는지 신부님은 피식 웃으시며 어려운 말 말고 좀 쉬운 말은 없느냐고 되물으셨다.
그날 이후 천국과 지옥을 찾는 내 영혼의 진짜 더듬거림이 시작되었다. 지옥이 뭘까? 그리고 천국은 ? 정확한 이론을 바탕으로 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개념을 갖고 공감된 지옥과 천국이기보다 막연히 착한 사람은 천국으로 가고 나쁜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익숙한 논리、그것이 나의 천국과 지옥에 대한 전부였다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온갖 괴로움과 고통의 집합체가 지옥이라면 부족함 없어 모든것이 채워지는 곳이 천국이라고 믿어왔다. 나는 그 천국 속에서 희망을、지옥에서 절망을 생각해본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작은 소망、행복、사랑、기쁨 이것의 씨앗의 희망이다. 행복한 가정과 사회를 희망하며 아빠가 직장에서 땀을 흘리는 헌신、보이지도 않게 참아내는 엄마의 온갖 인내、그런 엄마 아빠를 위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귀여운 꼬마가 갖는 희망이 바로 천국일 것이다.
수 천만원이 아니라도 틈틈이 모아 늘어가는 저축통장을 기꺼워하며 성실하게 살려는 희망을 갖고 행상을 하는 젊은이의 마음안에도 천국은 있지만、온화한 눈빛으로 지나온 세월을 감사하며 질그릇 같은 육신 속에 담아주신 영혼의 세계를 깊이 숙고하는 노인의 오늘도 역시 희망이다. 병고에 찌들고 고통에 지친채 죽음을 기다린다해도 이 육신이란 꼭 맞는 옷을 벗고 나면 하느님 그분이 친히 새옷으로 갈아입혀 주실것이라고 영생을 믿는 희망이 바로 천국이 아닐까?
하느님의 자비를 깊히 신뢰하며 나의 모든 잘못이 용서 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내일은 오늘보다 더 사랑하며 행복하리라는 희망、우리의 희망속에서 구할 수 없는게 무엇이며 내것이 아닌게 무엇이겠는가? 그렇게 천국은 나의 삶속에 깊히 용해된 희망인 것이다.
그러나 용서 받을 수 없으리라는 절망、인내와 헌신과 사랑이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는 절망、이 고통 중에 죽으면 그것으로 끝일 것이라고 믿는 절망이 바로 지옥이 아닐까? 절망이란 어두움、그보다 더 깜깜한 두려움이 있을까?
희망이 하느님의 빛을 따라가는 양지라면 절망은 하느님 조차 소외시키며 빛을 잃어가는 어둠의 잔치일 것이다.
창조주를 인간이 인정하든、하지 않든 하느님 그분이 계시고 우리들은 하느님안에 속한 피조물로 누구나 다 천국과 지옥인 희망과 절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내 영혼 안에서 무엇을 키워갈 것인가 하는 것은 나의 선택이다. 또한 나의 삶속에서 구체적으로 용해되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희망과 절망은 유한한 나의 60평생만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영생마저 좌우한다.
빛에 익숙한 사람은 죽음의 어둠 그 가운데서도 빛이신 그리스도를 만날것이고 그 희망은 우리의 삶을 선으로 인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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