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이듬해. 나는 무거운 죄명을 지고 영어의 몸이 되었다. 그곳은 과연 저주와 분노가 서로 맞닿은 곳이었다. 어두웠던 시절-고문의 매운맛도 보았다. 어쩔 수 없이 나도 역사의 아픔을 한줌 움켜쥐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끔찍한 감방 생활이 일년쯤이나 지났을 무렵, 어느날 밤 나는 꿈을 꾸게 되었다. 꿈에 누군가가 흘연히 나타나서 『너는 이 골짜기에서 벗어나라』고 이르고는 사라졌다. 무슨 조화였을까? 그날 아침, 나는 무거운 감방문을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저 조상님의 은덕이려니 하고 그 일을 지금껏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지난해 12월, 사상성당에서 교리공부를 하고 세례를 받았다. 유달리 게으른 내가 성당에 가는 것이 어찌 그토록 즐거울 수 있을까. 약2개월이 지난 어느날,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렇다. 저 얼굴, 저 얼굴이다. 45년전 나의 감방을 찾아주셨던 그분, 바로 그분이 저기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다』벅찬 감격의 눈물이 한없이 쏟아져 나왔다.
『주여! 미련하고 무지한 저를 용서해 주옵소서. 배은망덕한 이 자식을 지금도 사랑하고 계시는 내 아버지, 무엇으로 이 죄를 용서받을수 있을런지요』
우선 나는 백일기도를 드리기로 작정했다. 빌어도, 빌어도 다 못할 참회의 기도를, 뇌어도 뇌어도 끝없는 감사의 기도를. 마음은 가득한데 드리는 것이 너무나 보잘것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보년 당신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하다. 인생사 모든것이 우연한 일이 하나도 없다고 믿어진다. 내가 이와같은 은총을 누릴 수 있는것도 국민학교때 돌아가신 할머님의 뜨거웠던 신앙과 간절했던 기도, 이어지는 어머님의 신앙이 어찌 무관하다 할수 있으랴. 세상의 거친 들녘을 헤매다가 길을 재촉하는 저녁, 이제야 비로소 내가 깨달음의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러는지 해마다 더욱 싱그럽기만 하다.
이 짙푸른 녹음의 계절에 내 신앙도 한층 무르익어지기를 바란다. 살아온 날은 많아도 내세울만한 철학도 경륜도 없는것이 부끄럽다. 늦었다고 한탄말고 이제라도 참된 진리의 길을 탐구하련다. 하느님은 살아계시고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심을 아는 작은 믿음으로부터 내 이생의 새로운 장을 펼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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