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금빛 저녁놀에 그으기 취해 스러질듯 남몰래 머물러 있는 산 그리메. 동트는 아침산은 아침대로 좋지만 저녁 해거름의 그림자가 깃들이는 그때는 그때대로 좋다.
어찌 산만 그러랴. 바다엘 가면 바다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수줍을 땐 청옥빛, 속삭일 땐 갈매빛 괴로울 땐 괴로운 아청빛 하루해가 이즈러져 쓸쓸할땐 금빛 은빛으로 빛나다가 어쩔 땐 다시 쪽빛이기도 하는 바다.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은 휘영해 좋고 눈썹 같은 초승달은 으슴푸레한대로 마냥 가슴을 적신다. 무엇 한 가진들 그 자체가 세상이 아니라만 굳이 말한다면「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 청산의 어짊이 심금을 울린다. 그러나 아뿔사, 사람이 사람답지 못해서 무지막지한 행정과 정책이 산을 들쑤시고 들을 까뒤집어 헤친다. 그래서 마침내 하늘이주신 바를 지키지 못하고 「개발」이란 미명으로 온나라의 땅이며 산을 반쯤죽여 놓았구나.
지리산엘 가도 그렇고 태백산엘 가도 그러고 계룡산엘 가도 이제 계룡은 옛계룡이 아니로다. 그러니 올여름엔 이 작은 육신이 어디에서 시원한 그늘맞이를 할 것인지. 어찌할꺼나. 내 비록 자주 오르진 못했으나 마흔 몇 해를 마주보며 살아온 계룡산, 그 계룡을 멀리서나마 바라볼밖에. 말없는 저 산이 나에게 말하는 뜻, 그 뜻을 새삼 새기며 이 여름을 날꺼나?
「마주보기」
만약에 나를 만나고 싶거든
두메두메 산자락 어느 모퉁이
아무도 밟지 않은 흙으로 오라.
잠 못 들어 뒤척이던 까닭으로 오라.
해거름이 오면
비로소 그윽한 우리들의 마주보기
언제나 그대를 시리도록 보고 싶다.
행여 그대가 두둥실 달로 뜨면
나는 청솔가지 지핀 연기가 되어
머리 풀고 하늘끝에 피어 닿으리.
자, 빈 잔에 그대를 가득 채워서
흘러가는 나를 취하게 하라
그곳이 가야할 청산이라면 맨발에 피가 맺혀 아리더라도
이 밤도 우린 가야하니까.
사람을 사랑함도 마주보기요, 산을 사랑함도 마주보기에서 비로되는 것이니 그렇다, 이 여름엔 더도 말고 그대나 마주 보리로다. 성령 자주 오르지 못한다해도 멀리서나마 그대를 보리로다.
계룡산 연천봉은 하느님께 몸이 달아 물동이로 들이붓는 듯한 한밤중 장대비로 뜨거운 사랑을 식혀도 보는구나.
계룡산은 허리 굽혀 금강물에 머리를 감는다. 바람결에 송잎으로 빚어도 본다. 유리창나비가 계룡대신 날아올라 하느님께 사랑과 괴로움을 전해주려하나 그대로 될지는. 새오라기(계룡산의 매)가 계룡 사위는 심사를 전해주려 하나 과연 또 그대로 될는지. 살구나무 살구앞에 신맛이 그득 고이는 이 칠월에 개발되어 파헤쳐지는 계룡산은 결리고 쑤시고 아리고 온몸이 아프기 그지없다.
그러나 시월이 오면 당신때문에 나는 다흥으로 물드리! 그것은 천황봉 쌀개봉 봉우리마다 칠월이 그예 타고 남은 것이리니. 하나밖에 없는 이땅, 하나밖에 없는 계룡에 우리사람이 도끼질에 칼질에 몽두이질을 하고 있으니 내이 여름엔 그대에게 무릎꿇고 석고대죄라도 하라니 그대여 제발 용서하소서. 그리고 모질게 다시 살아나소서.
만약에 겨를이 생기면 이여름에 그대의 품을 찾아서 억수비 쏟아지는 그때를 맞아 그것이 그대의 눈물인 줄 알고 흠뻑 이몸도 함께 적시리로다. 내탓이오 내 탓이오 참회를 곁들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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