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 신자들의 사회적 배경은 한국인의 일반적 수준과 비교하여 계층수준이 뚜렷이 높게 나타난다고 한다. 교육수준이 한국인의 그것보다 훨씬 높으며, 직업 구조에 있어서는 소위 화이트 칼라층이 주축을 이루어 관리직, 전문직 종사자의 비율이 뚜렷이 높으며, 소득면에서도 일반적인 수준보다 상당히 높다고 한다. 그리고 지역적인 분포면에서는 농어촌 지역보다는 중소 도시지역, 중소 도시지역보다는 대도시 지역의 신자 비율이 높다고 한다. 그러므로 중산층화, 도시화되었고 할 수 있다.
신자의 구성이 중산층화, 도시화된다는것이 그 자체로서 문제가 된다고 할수는 없을 것이다. 신자의 중산층화, 도시화는 교회가 해방과 구원의 표징이 되도록 하는데에 기여할수도 있고 장애가 될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교회의 중산층 신자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느냐, 중산층 중심의 교회가 무엇에 관심을 갖느냐에 달려 있다.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우려되는 쪽이다. 교회 건물부터가 하느님 나라 운동을 하자는 것인지 집 자랑 하자는 것인지 헷갈린다. 복음에는 집 자랑이 없으나 천상 중산층 환상이 빚은 결과이리라. 사시사철 제대를 장식한 화려한 꽂꽂이, 번쩍이는 집기들과 신기한 옷차림과 몸짓들, 질서정연하고 엄숙한 분위기 등은 홀리려는 장치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중산층 환상이야 중산층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이들에게도 널리 퍼져 있다. 시골의 작은 공소도 언덕위에 버젓하게 지어야 되는줄알고, 기꺼해야 기십명 모이는 자리건만 오순도순 돌러 앉으면 큰 탈이나 나는듯 무대를 향하여 줄맞추어 의자에 앉아야 한다고 믿는다.
큰 집에 시간 맞추어 수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는 절차에 맞추어 줄줄 외우고는 우르르 흩어진다. 도시 중산층 익명인들의 개인주의와 딱 들어맞으리라. 어렵사리 형제라고 부르고, 공동체를 얘기하고 이웃을 들먹이지만 말치례에 지나지 않는가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신앙의 형식주의, 개인주의에 치우친다는 우려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개선될 기미보다는 심화되는 현상이 더 눈에 띈다. 안정된 생활에 연연하는 중산층으로서는 해방이 내 하느님나라 운동이내 하여 신앙때문에 실존적, 사회 구조적 고민에 끌려들긴 싫을지 모른다.
한편 교회에 열성적인 이들도 중산층이 많다. 그들은 교회 운영에 깊숙히 참여하고 숱한 희생을 치르며 봉사 황동에 앞장 선다. 그러나 이때에도 중산층적인 발상에 묶여있기 쉽다. 교회운영은 무슨 행사, 선물의 유지 관리, 예산 집행들에 대한 기술적인 방법 찾기에 기울곤 한다. 사목적인 주제에 대해서일 경우에도 이를 관업이나 실적 위주로 대하여 양적으로 파악하기를 즐기니 하느님나라 운동적이라기 보다는 천주교회원 관리적이라야 될것같다. 자연, 교회의 행사도 의형에 치우쳐 행사때마다 복장들은 왜 그리 요란하며 꽃다발이 난무한다. 그저 여기저기 들이 대고 번쩍번쩍 사진을 찍어대니 앨범에 꽂으려 세례를 받고 첫영성체를 하는 듯하다. 봉사활동, 자선활동도 가난한 이들과 삶을 나누려는 자세보다는 무슨 떠벌리는 행사가 되기 일쑤이다.
이렇게 열거하는 교회의 중상층화 현상에 대한 우려들이 그렇게 대표적이거나 전형적인 예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같이 우려해야 할것이 무엇인가 집히기는 할것이다.
가난한 이들 위한 중산층의 교회가 될수도 있다. 중산층이 스스로 삶의 방식을 바꾸어 가난한이 연재해 갈때 가능하리라. 이 길이 예수의 길이니 신앙인이라면 따라야할 길이기도 하다. 어떤 점에서 예수 자신이 가난한이 중의 한사람이다. 하느님이시면서 인간이 되셨고, 멸시받는 나자렛 촌사람이 되셨으며, 목수의 아들이셨고, 천민들과 한패였으며, 끝내 부당한 재판에 의하여 범죄자로서 처형되셨으니 가히 가난의 진수라 할 만하다.
이 시대 이 땅에서의 예수의 길은 어떻게 제시되는가? 현대사회는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특정한 구조로 구조화되어 있다. 이 사회 구조는 부유층과 권력자들이 민중을 계속적으로 지배하고, 그 지배를 도욱 조장하도록 짜여져 있다. 이 구조는 견고하게 계층화되어 있어서 개인적인 저항이란 무의미하기 일쑤이다. 그런데 문제는 중산층이 우리 시회가 이렇게 구조화 되도록 역할을 맡고 있다는데에 있다.
이 불의한 사회구조는 중산층에서 층원된 사람들이 제공하는 전문적이고 상업적인 용역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중산층에게 도전이 제기된다. 개인의 태도나 낱낱의 행위가 선의에 바탕을 두고 그 자체로서는 선한 일일지라도 구조의 틀안에서 수해하고 있는 일은 결국은 구조적 불의를 강화하는데 기여하도록 되고마는 법이다.
우리는 어떻게 지배층의 이권에 봉사하기를 그만두고 가난한 이들 편에서 설수 있는가? 먼저 자신이 맡고 있는 역할과 수행하고 있는 일이 사회구조에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가에 대한 식별이 요구된다. 의식화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의식화 과정에 뛰어든 이들이 이젠 신앙이 어떤 심리적인 상태이거나 사회적인 관행에 머물순 없게 된다. 해방운동, 하느님 나라 운동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는 개인으로는 워낙 무력한 법이니까 의식화를 확산하여 가난한 이들과 연대에 나서야 할것이다. 연대의 과정은 가난한 이들의 삶, 슬픔, 기쁨, 희망과 공포를 함께 나누는 경험적인 방법으로서의 투신이 요구된다.
실천없이 민중의 이권에 봉사하겠다는 노력은 그들을 보호하는체 하겠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들에게 이전보다 더욱 무력감과 종속감을 줄것이다.
중산층 신자들이 민중의 이권을 돌보는 구조와 기관안에서 일하고 살려는 투신에 나설때 중산층이 교회는 축복의 교회가 되리라. 그런데 가슴이 뜨거워지질 않고 얼굴이 달아 오른다. 「너는 무엇을 어떻게 하였느냐」에 대답이 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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