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꽃 헤벌름 웃고있는 마당에 식구들이 모인다.
낮에 장에 들려서 사온 수박을 이가 시린 우물물에 채워 놓았더니 아가들 성화가 대단하다. 커다란 쟁반에 수박을 앉히고 과도를 대기가 무섭게 쩌억 갈라진다. 코끝에 감도는 수박의 향기, 군침돌게 흠벅진 속살을 베어문 순간 가슴 가득 차오르는 기쁨이 있다.
처음인듯 느껴지는 그분의 햇살, 그분의 바람 그리고 낮에 만난 농부의 손길도.
여름이 우리집에는 수박 등을 타고 온다. 식구들이 둘러앉아 수박을 베어물며 화목해지고 수박을 많이 먹고 잔 새벽외가댁 요에 지도를 그렸다는 옛이야기도 재미있지만 오늘같이 뜨겁게 감사한 마음이 들기는 처음인듯 싶다.
우리가 장터에 도착한것은 오후였다. 썰물 빠져나간듯 휭한 장터, 오늘이 분명 열이를 장날인데 왜 이리 썰렁할까 안장터 마당을 둘러본다.
밭으로 설설 걸어갈듯한 열무를 손수레에 싣고 부부가 앉아있다. 손님을 기다리는 모양인데 다들 어디로 갔을까.
전같으면 노상에 펴놓고 파는 국밥집이 때도 없이 북적거리고 순대국집 막걸리도 동이날 시각인데 한산한 장터가 아무래도 걸린다.
저만치 무우배추 장수는 주섬주섬 보따리를 챙기고 더위대목을 보려던 밀짚모자 장수는 벌레씹은 얼굴이다. 그러고보니 모두가 후줄근한 모습들이 소나기가 지나갔나 보다.
우리가 시골집에 오는 날을 장날로 잡는 것은 구경거리가 많은 이유도 있지만 고향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즐거워서다. 싸구려 옷전에서 만난 이 웃사촌 생선전에서 또 만나고 약장수 북치는 곳에 가면 알만한 사람 다 만나본다.
시커멓게 탄 얼굴이며 마디 굵은 억센손 잡으면 저절로 편안해 지는 심정이다.
강아지 파는 곳을 돌아서 나오는데 『수박 사유-』귀에 익은 사투리가 들렸다. 돌아다보니 젊은이가 경운기 옆에 서서 크지도 않은 수박을 가리키며 손님을 부르고 있다. 꿀맛같은 수박이라느니 설탕수박이라느니 형용사에 전 서울귀에 그 한마디는 생소했지만 발길이 멎었다. 『맛이 어때요? 경운기로 모여든 손님들 때문인지 젊은이는 수줍은듯 『달어유-』한마디다.
그러고보니 동업하는 사람이 있어뵈이지도 않고 금메달이니 황금메달이니 하는 상표를 붙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필경 자기집 밭에서 수확해온 과일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그때 한 손님이 수박을 골라들고 비싸다며 빼달라고 조르자 난차한 얼굴이된 젊은이는 『밑저유-』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웬일로 밀저유하던 얼굴이 자꾸 떠오르는 것이다. 오랜 장마로 꼭지가 빠지고 넝쿨이 못쓰게 되었다는 참외 수박 농가들.
도시사람들은 바나나와 메론 등 수입농산물에 맛들이고 그들을 믿고 뙤약볕에 땀흘린 농부들은 헛탕을 친다. 밑지면서도 팔아야 하는 시한작물. 「밑저유」한마디가 곧 「살려줘유」하는 농민들의 탄원으로 들림은 내 심사탓인가.
우리가 여름마다 시골 집에 와서 머무는 것은 그들과 함께 고추밭 골에서 땀을 흘리고 끝없이 밀려가는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싶어서다. 사실은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지만 함께 애타하는 이웃이 있음을 알기나 하는지….
푼푼하지는 못해도 장날이면 장골목이 미어터지게 모여들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한파수 멀다하고 만나 정을 나누던 이웃들은 무엇을 할까.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피서지로 빠지고 일만 남아 고달픈 농촌. 곧이 곧대로 사는 사람들의 과일이 불티나게 팔리고 장터골목이 시끌벅적 해질날은 언제일까.
딸흘리는 여름, 성장의 여름, 그리하여 바구니마다 가득한 수확의 기쁨이 그들 몫이 되게 수박 한 입 베어물고 그분을 생각한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