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휴가철이다. 해변, 산, 어디나 할 것 없이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특히 바다는 젊은이들의 원색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있다. 푸른 파도와 젊은이들의 싱그러운 모습이 아주 잘 어울린다. 이러한 분위기에 젖는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거기에는 생명이 약동하고 있기때문이다. 참으로 보기가 좋다. 억센 파도를 가르며 뒤어드는 모습, 작열하는 햇빛 속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힘의 역동감, 모두가 생명의 향연과 같다. 그런데 그런 젊은이들의 내면적 모습은 어떨까? 과연 겉모습과 동일할까?그 내면적 모습도 겉모습과 동일한 생명력을 가졌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그것은 희망 자체이고 기대감의 절정일 테니까 그런데 우리는 왜 내면적 모습에 대해 우려하는 마음으로 돌아서려고 할까.
사실 젊은이들의 아름다움과 건강은 순수하게 나눌 줄 아는 인간관계에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것은 가난한 마음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용돈이 남아도 싸구려 옷을 사 입기를 좋아하는 마음, 부모가 부자라도 버스를 타고 걸어다니기를 좋아하는 마음,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벗삼아 텐트생활을 즐길 줄 아는 마음, 어려운 사람과 함께 땀 흘리기를 좋아하는 마음, 올바름을 위해서라면 자기를 희생할 수도 있는 마음.
젊은이들은 진정으로 가난한 마음을 가졌기에 신선한 생명력으로 가득하게 마련이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부모나 기성세대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한다. 따라서 자기 재산이 없다. 없으면 없는대로, 있으면 있는대로 행동한다. 그것이 젊은이들에게는 어울린다. 성격적으로나 체질적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보인다. 허름한 청바지 차림으로 책가방을 옆에 끼고 활보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신선한 바람과 같이 상쾌함을 준다.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의 현실을 보는 것만 같다.
적어도 젊은이는 젊은이다운 모습에서 그 신선함을 풍기게 마련이다. 그런데 인생을 다 산듯한 기성세대적 말년의 안락과 안일에 몰두하는 듯한 일부 젊은이들의 모습을 아주 쉽게 볼 수 있어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하루 숙박료가 웬만한 청소년 근로자 한 달 봉급과 거의 맞먹는 해변가의 특급호텔에서 휴가를 즐기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쉽게 볼수 있다. 부모와 함께 왔나 했더니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그들은 한 잔에 몇천원씩하는 커피 한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듯 호텔 커피숍을 거의다 차지하고 있을 때도 있다. 이러한 젊은이들의 모습은 비단 이러한 장소뿐만 아니다. 이미 우리는 국민학생이 학용품을 사는데 10만원짜리 수표를 지불했다는 보도를 익히들어 알고 있다.
며칠 전 TV 뉴스에 무슨 학생협의회 의장이라는 젊은학생이 체포되었는데 그 의장이 자기 비서실장을 대동하고 타고 다녔다는 대형 승용차인 슈퍼살롱을 방영한 적이 있다.
이러한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떤 깊은 실망감을 감출수 없다. 그러한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썩은 기성세대적 안락과, 무사와 안일, 그리고 야비한 야망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결국 이러한 젊은이들을 만들어낸 현실이 슬프기만 하다.
자기 자식들의 영혼이 썩는지도 모르고 분별없이 마구 돈을 주는 돈많은 일부 부모들.
웬만한 기성세대도 가기 힘들고 사기 힘든 것들을 아주 수월하게 가고 살수 있게 하는 돈많고 분별없는 부모들. 결국 밝혀지고 마는 정치적 흥정과 그 야망을 채우기 위해 이용가치만 있으면 젊은 학생이라도 이용하고자 하는 일부 기성 정치인들. 이들 기성세대는 이러한 젊은이들의 모습을 볼줄 모르며 느끼는 바가 없는지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어떤 자매님의 소박한 개탄이 이런 현실을 아주 잘 표현하는 듯하다. 하루는 옆집에 사시는 자매님이 아이들 데리고 그 자매님 댁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그 아이는 그 집 냉장고를 열어 제치고 과일이며 음식을 내어 먹고 있었다. 주인이 되는 자매는 그 아이의 어머니가 있기에 주의를 주지못하고 그 아이의 어머니 눈치만을 보았다.
그런데 그 아이의 어머니는 『저 애가 저렇다니까요! 못말려요!』라고 하면서『그래, 이왕 꺼냈으니 먹어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 자매는 아이를 그렇게 가르쳐서 그 아이가 장차 무엇이 되겠느냐며 개탄했다.
우리 기성세대는 올바름에 대한 가르침에 있어서 어떤 핑계도 가져서는 안된다. 가르침에 있어서는 순교자적 태도로 임해야 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양보없이 가르쳐야 한다. 우리 사회의 장래가 젊은이에게 달려있기에 그들에게 올바른 도덕성을 심어 주어야 한다. 잘 먹이고 잘 입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올바른 정신을 박아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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