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法頂) 스님의 글, 「운림산방」(雲林山房)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남해 진도의 첨찰산 아래 운림산방이 있다. 소치(小痴), 허유(許維)가 말년을 살던 곳이다 소치는 조선후기 산수화가로 추사(秋史)에게 서화를 배워 나중에는 궁중에 까지 알려진 화가가 되었다.
소치가 부채에 그린 산수화 「선면산수화(扇面山水畵)」는 소치가 살던 곳의 실경이라 한다. 부채그림의 여백에 화제시(畵題詩)를 가득 채웠는데 나대경(羅大慶)의 글로 이런 내용이다.
『내 집은 깊은 산골에 있다. 봄이 가고 여름이 다가올 무렵이면 푸른 이끼가 뜰에 깔리고 지는 꽃잎이 길바닥에 가득하다. 사립문에는 찾아오는 발자국 소리 없으나 솔그림자는 길고 짧게 드리우고, 새소리 높았다낮았다 하는데 낮잠을 즐긴다.
이윽고 나는 샘풀을 길어오고 솔가지를 주워다가 차를 달여 마신다.
그리고 생각나는 대로 주역(周易) 국풍(國風) 좌씨전(左氏傳) 이소경(離騷經)과 태사공(太史公)의 그림과 도연명 두자미의 시와 한퇴지 소자첨의 문장 등을 읽는다.
그런뒤 조용히 산길을 거닐면서 소나무와 대나무를 어루만지기도 하고, 사슴이나 송아지와 더불어 풀섶에서 뒹굴기도 한다. 앉아서 흐르는 시냇물을 구경도 하고 또 맑은 시냇물로 양치질을 하거나 발을 씻는다.
돌아와 죽창(竹窓) 아래 앉으면 아내와 자식들이 죽순나물, 고비 나물을 만들고 보리밥을 지어준다. 나는 기꺼이 이를 배불리 먹는다. 이윽고 붓을 들어 크고 작은 글씨 수십자를 쓰고 집안에 소장된 법첩(法帖)과 묵적(墨跡) 서권(書券)을 펴놓고 실컷 구경한다.
그리고 집을 나가 계산(溪山)으로 가서 친구들을 만나 뽕나무와 삼을 묻고 메벼와 찰벼를 말하며, 음양을 헤아리고 절후를 따지며 서로 어울려 한참 동안 이야기한다.
다시 돌아와 지팡이에 기대어 사립문 아래 섰노라면, 지는 해는 서산마루에 걸쳐 노을이 붉게 타오르고 빛깔이 수만 가지로 변한다. 소를타고 돌아오는 목동의 피리소리에 맞춰 달이 앞시내에 돌아 오른다. 』
요즘의 우리로서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정경이다. 일에 쫓기고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으로서는 이런 유장한 삶이 오히려 불안하기까지하다. 현실에 빈틈없이 매여 있어야 안심을 한다. 내가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를끌고 간다.
그러나 옛 선인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삶을 즐겁게 가꾸어 간다고 할까, 창조해 가고 있다. 궁색한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가 않다. 한가와 여유를 사랑하고, 독서인으로 문화적 소산을 누리교양을 가까이 하고 있다. 또 이웃과 기꺼이 어울리며 현실과 담담하게 만난다. 살림살이는 비록 가난했을 망정, 요컨대 만족과 편안함이 있다.
그것은 향기가 배어 있는 삶이다. 이럴 때 사람은 산다고 할수있다. 인간다운 삶을 산다고 할수 있다. 요즘 우리 세태는 그렇지가 못하다. 생존만 있고 생활이 없다. 사람다운 생활이 없다. 사람다운 생활은 물질과 재산이 풍족하듯이 정신과 영혼도 살아 있어야 한다. 정신과 영혼은 밖에 잇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 있다. 내 마음 안에 있는 정신과 영혼이 풍성해지려면 물질이나 바깥으로 돌려진 눈이 다시 자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눈을 자기에게 돌려야 한다. 자신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형혼의 깊은 곳에 그윽히 고이는 맑은 샘물과 같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 내면의 소리는 한가롭고 적적한 고요와 더불어 온다. 바깥으로 향한 마음이 바쁘고 번거롭게 생존을 쫒아 다닐 때, 내면과 영혼의 소리가 들릴리 없다. 불안과 도로와 죽음과도 같은 타성이 있을 뿐이다.
올여름에도 더위를 피해 사람들은 산으로 바다로 떠났을 것이다. 그런데 어디로 가서 더위를 피한단 말인가. 피서지로 몰려든 사람들 틈에서 오히려 더위와 피로만 얻어올 뿐이다.
잠시라도 한가로운 마음의 여유를 가져보자. 적적한 고요을 사랑하자.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그곳이 바로 시원하고 청정한 피서지가 아니겠는가.
돗자리를 펴고 누워 그 서늘한 감촉을 즐기며 잠시라도 일없이 지내보자. 라디오도 끄고 신문도 저만치 던져두자. 숨막히는 한낮의 염열도 지나가고 이윽고 분꽃이 피는 저녁나절이 온다. 이 텅빈적료 속에서 문득 찾아오는 자신의 모습을 마주 보자. 그가 무슨 말을 하리라. 그 말을 아아 듣고 대답하는 가운데 우리는 싱싱하고 발랄한 새로운 자기존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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