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 시절의 놀던 모습과 오늘의 아이들이 노는 형태가 너무나 달라졌다. 한마디로 그 때에는 생명체와 친숙했는데 지금은 생명이 없는 장난감들과 많이 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그때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짓궂은 장난들이기는 했지만 메뚜기를 잡아 볏집에 꿰메고, 개구리를 잡아 밀짚으로 배를 뽈록하게 만들었던 그리고 병아리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토담 아래 봉을 만들어 장례치룬 모습들. 비록 별다른 장난감이 없어도 곤충과 동물들이 나의 벗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변화된 사회구조 속에서 도심지는 곳곳마다 콘크리트와 철재들 그속에서 동물들은 삶터를 잃어가고 아이들과 생명체들과의 만남은 줄어들게 되었다. 그래도 얼마전 까지는 시멘트로 포장된 성당 앞마당에서 아이들이, 어디서 퍼왔는지 흙장난하는 모습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모습마저도 사라져버렸다. 자전거와 플라스틱 제품을 가지고 노는 모습들뿐이다.
인간은 서서히 생명체 보다는 자신들이 만든 생명이 깃들지 않은 것들에 더 흥미와 가치를 두며 정신없이 살아가는 것 같다. 말(馬)보다는 자동차가, 흙보다는 플라스틱이 더 좋아서 일까? 세워둔 차를 심술궂은 아이들이 못으로 긋고가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하지만 곰의 쓸개를 보신용으로 먹기 위해서는 칼로 가슴을 찌르며 아무런 생각없이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생명에 대한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파괴하지 않을 수 없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생명을 보다높은 형태에서 유지시키든가 아니면 발전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면 그 정당성을 쉽게 납득 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생명이란 참으로 놀라운 것이기에 우리가 쉽게 이야기하고 단정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마저 든다. 욥기의 내용에서(욥기 38장, 39장)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세상을 창조하던 그 때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질문하신다. 그러나 욥은 아무런 할 이야기가 없었다. 그때 그는 사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처럼 생명이라는 것은 누구도, 무엇이라도 관여하지 않고 순수하게 하느님만이 부여하실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숨귀고 생명있는 것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만을 할수 있을 뿐 생명 그 자체에는 임의적일 수는 없는것이다. 우리가 사는 동양에서도 명(命)은 곧 천명(天命)을 말하는것이다. 즉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순천명(順天命)할 때 인간들은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바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생명에 대해 우리가 임의적일 수 없다는 우리 삶터에서의 해석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숨결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숨쉬는 모든 것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얼마전 용인에서 수해가 있었다. 저와 친분이 있는 어떤 분의 고향집이 터만 남고 모두 쓸려 버렸다고 한다. 그 마을에서 수해를 당한 분들은 먼저 비를 탓하기 전에 마을 위의 황토 및 골프장 터를 바라 보았단다. 나무 숲이던 산이 있었던 자리였단다. 그곳에서 숨쉬던 많은 숨결들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분명 생명은 임의적으로 조작 되거나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한결 더 하게 한다.
자연의 첫 호흡 같은 봄은 모두를 놀라게 한다. 관심 조차 가지지 않던 그 곳에서 알지도 못하는 무엇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또한 언제나 우리에게서 잊혀진듯한 자신의 숨결을 느낌때 알수 없는 그 힘에서 경이로움을 느끼고 생명이라는, 살아숨쉰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에 경외감마저 느끼지 않을수 없을것이다. 우리들의 대상이 되어 늘 그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숨결을 토해내는 자연의 사물들은 그대로 두면 잘들 살아간다.
그러나 대단한 피조물이라고 자처하는 인간들은 갈수록 삶이 힘들고 어려워 지고 있는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을 옛날 중국의 위인들인 노자(老子) 장자(莊子)같은 사람은 인위적 즉 인공적(人工的)으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제대로 숨쉬는 것이 인간뿐이라는 이기적인 생각때문이 아닌가 하고 느끼게 된다. 자신의 생명을 존속 시키려면 어떠한 것의 숨결도 희생될 수 있다는 식의 사고로 변해가는 요즘의 세태를 통하여 더 깊게 느끼게 된다. 땅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왔던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콩을 심을 때 세개씩 심는다고 한다. 물론 하나는 우리가 먹기 위해서 이지만 다른 하나는 하늘의 새들을 위해서 또 다른 하나는 땅위의 벌레들을 위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생명과 함께 숨쉬고 있음을 더 깊이 인식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참으로 숨쉰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다. 그 역동적 힘은 경외감 마저 자아내게 한다. 새봄 아스팔트를 뚫고 나오는 여린 새싹은 무한한 생명의 힘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안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깊이 간직해야 함을, 그 놀라움을 느낄수 있어야 할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선 우리들 자신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신비로움을 가지고 나와 만나는 모든 것들이 그렇게 생명의 호흡을 하고 있음을 더욱 부드러워 지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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