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인생의 삶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때가 1981년 봄부터였다. 이때의 나는 30여년을 노력하여 열심히 살아온 보람으로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예쁜 딸 둘, 이렇게 네가족이 조그만 아파트에서 오붓하게 살아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즈음 나는 심신이 매우 지쳐있었고 매일 반복되는 직장생활의 굴레에서 벗어나 보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직장생활을 통해서는 나의 성취욕이 채워질 수 없다고 판단 됐기 때문이며 또한 나의 능력을 과신하여 사업에 대한 자신심이 넘쳐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그때 나는 개인 사업을 통하여 나의 인생을 성공시켜 보려는 야망에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그 야망은 하나의 꿈일뿐 좀처럼 나에게 현실로 다가오지 못했다. 직장의 특수성 때문에 토요일ㆍ일요일도 없이 거의 출근을 해야 했으며 영업과 창고관리를 맡고 있었으므로 술좌석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회사에서 나의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항시 불만에 쌓여있었고 거기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술로 이겨내려는 현실도피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 생활이 몇 년 반복되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지「이렇게 인생을 꼭 살아야만 하는가?」하고 반문하게되었고 새로운 삶에 대한 어떤 갈망을 느끼게 되면서부터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무렵 나의 아내는 나의 생활에 실망했던지 교회를 다니자고 권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나는 그 말이 내심으로는 싫지 않으면서도 대꾸하는 말은 늘상 「차라리 내 주먹을 믿어라!」였고 교회에 가려면 성당에나 가라고 하였다. 나의 아내는 결혼전에 개신교에서 세례까지 받은 아주 열심한 신자였다. 나도 군대생활을 하면서 너무 감정이 메말라 버린 생활이 안타까워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시간이 갖고 싶어서 교회에 다녔으며 제대 후에도 계속 신앙생활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너무 세속화 되어버린 개신교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그만 두어 버렸다.
그후 신앙에 대한 갈등이 있을 때마다 어렸을 때 몇번 다닌 성당의 내부벽화와 장엄한 미사 분위기 때문에 가톨릭에 마음이 끌리었다. 그래서 아내가 교회를 권할 때마다 성당 이야기를 하곤 했다. 이때의 나는 역경을 이기고 이정도 삶의 기반을 닦은데 대해서 굉장한 자부심과 자신감에 차있었다. 아마도 신앙인의 눈으로 보았다면 교만덩어리였을 것이다.
이렇게 불만과 갈등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세월에 휩쓸려 나날은 보내고 있을 때 아내에게 변화가 생겼다. 퇴근후 집에 오면 꽃꽂이가 되어 있었고 시일이 지나다 보니 뭔가 꼭 집어 낼수는 없었지만 아내가 변화되고 있음이 느껴졌다. 꽃꽂이 봉사자의 도움으로 성당에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 아내는 나에게 같이 성당에 다니자고 하였으나 나는 항시 「바쁘다. 나 같은 죄인이 무슨 성당」하면서 아내의 일을 막아 버리곤 했다.
81년이 저물어가는 11월에 우리가족은 서울 반포동에서 과천시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새 집에 새 가구도 들여 놓고 아주 행복에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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