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性)이라고 하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긴장을 합니다. 「섹스」(sex)라고 하면 조금은 거칠고 난잡한 느낌을 받습니다.
사실「성」이나「섹스」는 똑 같은 말인데도 각각 다른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성」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크고 작은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누군가「성」은 매우 중요한 일이니까 따로 이야기를 나누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합시다.
적어도 부부들에겐「성」이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겠으나 그것만이 유독 중요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매우 중요하니까」따로 떼어놓고 이야기 하자는 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이니까 지금 당장. 또는 정면에 끌어내서 이야기 하자는 주장은 잘못일까요?
그런 뜻에서 나는 결론을 서둘러 쓰고 있습니다.
「성」은 곧 대화(對話)입니다. 그것의 바탕은 행위가 아니라 부부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사랑의 대화입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 줌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치의 개념에서 설명되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일치」(一致)한 육체적 관계에서 얻어지는 로맨틱한 관념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깊은 소속감을 뜻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없이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깊은 소속감은 혼인성사를 이루어 나가는 창조적인 반응입니다.
말이 이쯤되면 꽤나 어렵게 되고 말았으나 창조적인 반응을 어떻게 할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보다 현실적인 설명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언제 배우자를 의미 깊게 안아보았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하실 수가 있으나 그것이 행위였느냐. 아니면 대화였느냐고 묻는다면 난처해집니다.
왜냐하면 부부라 할지라도 행위로써의 성생활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너무 많은 부부님들이 대화란 입으로 하는것으로 알고 계십니다. 손해가 막급합니다.
따라서 손으로 만지거나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거나 피부가 접촉하는 무언의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별로 말하지 않습니다.
말한다해도 활용을 하지 않습니다. 손해는 이정도 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올씨다.
부부의 성생활이 단순히 신체적인 반응이나 상대에 대한 어떤 의무로 인식하게 됩니다. 「성」은 의무가 아닙니다. 「대화」입니다. 부부의 대화란 모름지기 가슴속에 일어나는 느낌과 생각과 경험한 것들을 나누는 모습입니다.
언어에 의한 대화가 발전해서 무언(無言)의 대화가 되고, 또 무언의 대화가 무르익어서, 「성대화」(性對話)가 되는 것입니다.
「성대화」의 완성도를 높히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기관을 총동원 해야만 합니다. 시각과 청각과 후각 등등…. 모든 감각을 총동원해야 한다는것은 가장 적극적이면서도 전폭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이며, 전인격의 나눔이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성사적인 부부라면 서로를 기쁘게 해주거나, 만족하게 해 주는 정도로써의 성생활은 아쉬운 느낌입니다.
수준이 너무 낮다는 것입니다. 「성사적인 것」과 「대화적인 것」을 함께 생각해야만 합니다.
가톨릭 부부가 자칫 잘못하면 빠지기 십상인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기도생활과 성생활과 부부생활이 각기 별개의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들은 따로 따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나니라 함께 어울려 있는 것입니다. 진실한 부부생활 그 자체가 기도입니다. 그래서 어렵다는 것이 아닐까요.
특히 가톨릭 부부님들은 「성」(性)에 관해선 점잖해야 한다는 식의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를 자세히 들여다 보십시요. 가톨릭 교회만큼 대담하고 개방적인 곳은 썩 드물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만큼 부부를 과대평가(?)하는 곳도 없습니다. 혼인성사란 것이 있습니다. 혼인성사가 얼마나 위대한지 모릅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오늘날 신학(神學)에서는 교회를 ①하나의 제도로써 ②공동체로써 ③하느님 구원사업의 표지로써 ④말씀의 전달자로써 ⑤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온 인류를 위한 봉사로써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혼인성사는 교회의 다섯가지 요소에 굉장한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입니다.
혼인성사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의한, 교회를 위한, 교회안에서, 교회의 것입니다.
성대화도 부부의 많은 일상적인 일들중에 한가지 입니다. 따로 떨어져 있는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성생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일들도 성생활만큼이나 소중합니다.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부부가 혼인성사를 이루어 나가고 있는 것속에 성생활이란 것도 있습니다.
다만 노력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부부는 당연히 자신들의 성생활이 행위가 아닌 대화가 되도록 「성」(性)에 관해 이야기를 틈틈이 나누어야만 합니다. 음담패설이 아닌 진솔한 대화가 있어야만 합니다. 괜스리 체면 차려봐야 손해만 봅니다.
분명히 설명하지만 우리 부부는 성(性)에 관해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결과 28년의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은 결혼생활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이글을 쓰는데는 상당한 결심이 있어야 됐습니다. 벌써 필자만해도 탱탱 먼지낀 구세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