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영성 신학자인 까를로 까레또는 그의 저서에서 「고통은 새로운 변화를 위한 긍정적 사건」이라고 소박하게 말하고 있다.
그는 농촌에서 자랐다. 부모에게 신앙 생활을 배웠고 평화롭고 신앙적인 농촌생활을 했었다. 그의 가족은 신앙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평화로운 농촌사람으로서 평범하게 살았다. 그런데 어느날 예기치 않은 혹심한 우박이 쏟아지는 바람에 모든 농사를 망치고 말았다. 더 이상 거기에서 살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황폐화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의 가족은 살기 위해서 도시로 흘러들게 되고 그들은 많은 고생을 한다.
그런 와중에 그의 부친이 가까스로 철도청에 일자리를 구하여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된다. 그 도시생활에서 농촌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영성적인것을 많이 배우게 되었고 그의 형제들 중에는 선교사와 수도자들이 생겨나게 된다. 이런 결과를 보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일은 항상 재난을 통해서 다가왔다』라고 하면서 성 아오스딩의 말을 인용한다. 『하느님께서 악을 허용하시는 때는 오직 그것이 선으로 바뀌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때다』
우리는 희희락락하면서 살수만은 없다. 어떻게 보면 삶 전체에서 즐거움 보다는 고통이 더 많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러한 고통이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단지 그것으로부터 탈출하고자하는 노력, 그 이상의 어떤 무엇도 아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 출현이래 고통의 의미만큼 이야기된 것도 없으리라. 희생의 측면에서 단련의 측면에서 등등.
하지만 현실적으로 당하는 고통은 악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악으로부터의 해방은 곧 고통으로부터의 탈출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어떤 종류의 고통이든 간에 당하고 싶지 않고 탈출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도리어 새로운 변화를 위한 과정일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하고 있다. 한 인간의 삶의 과정에서도 그것을 체험할 수 있고 사회공동체의 성장과정에서도 볼 수 있다. 어떤 고통이 한 개인이나 또는 사회적 차원에서 없었더라면 그 다음에 전개된 상황들이 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고통이든 극복하려고 했던 인간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극복되어진 상황은 발전적이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고통을 극복하려는 자세이다.
즉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도덕성의 문제이다. 어떤 고통이든 그것을 극복하는 데는 거기에 맞는 도덕성을 상실해서는 안된다. 이를테면 자기 건강을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먹고 행동하는 따위는 정신적 황폐와 질식을 가져 오게 되고 도리어 다른면에서 건강을 망치게 마련이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단지 그 고통 앞에서의 우리의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을 극복하고자하는 나의 깊은 인격적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시말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떤 고통을 극복하려는 태도는 자기뿐만 아니라 공동선을 파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도덕적으로 극복 하려고 한다면 고통은 참으로 무의미한 재난일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고통이 새로운 변화의 의미를 가질 수 있기 위해서는 도리어 그것을 성실하게 맞이할 줄 아는 인격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나에게 닥친 이 고통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고요히 눈감고 기도하는 자세로 주 하느님 앞에서 생각하는 것이 진정 인간다운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참으로 인간다움은 고통을 사색할 수 있을 때가 아닐까 한다.
이제 가을의 문턱에서 좀더 사색적이 됐으면 좋겠다. 생각없이 함부로 사는듯한 혐오스러운 행동들 속에서 나는 어떤 모습일까? 조그마한 고통도 인내하지 못하고 짜증으로 가득차 있는 모습이 아닐까? 조그마한 고통 앞에서도 비굴해지는 나는 아닐까? 물질적으로 어느정도 풍요로워진 지금 우리는 조그마한 고통 앞에서도 너무 쉽게 무너지고 말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고통 앞에서는 인간성이건 도덕성이건간에 생각할 여지도 없이 행동해 버리는듯한 생활태도가 현재 우리들의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들 떨칠 수가 없는 것이다. 조그마한 불편으로 오는 고통이 싫어서 생각없이 행동해 버리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를 팽배시키는 것인지를 생각해봐야 할것이다. 자기가 먹은 뒷처리를 정리해서 가지고 오는것도 하나의 고통이라고 한다면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물 맑은 계곡에 그 찌거기들을 쑤셔박아 놓고 오는 행동은 거대한 고통 앞에서의 도덕성을 말하기에 앞서서 가장 하잘것없고 조그마한 도덕성마저 지칠줄 모르는 인격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조그마한 불편, 그것이 일생 생활에서 고통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올바로 극복할 때 새로운 변화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본다.
외제 냉장고 대신에 국산 냉장고를 씀으로써 생기는 불편이 고통이라고 한다면 그 고통을 극복함으로써 생기는 차익금을 자선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변화의 신비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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