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5월이 격동의 달이 되었던가. 가장 아름다운 계절로 성보님을 노래했고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있기에 가정의 달로서 기념되고 있는 5월이 아닌가.
그러나 해마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오월은 이제 계정의 여왕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으로 우리앞에 서게 되었다.
바람과 태양이 길 가는 사람의 겉옷 벗기기 내기를 했다. 우선 보기엔 바람이 이길 것 같았지만 그러지를 못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수록 그 사람은 겉옷을 더 단단히 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양은 옷자락 하나 흔들만한 힘이 없었지만 따뜻함의 열기로 인해 스스로 겉옷을 벗게 만든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이솝우화의 한 대목이다. 그러나 잘 알고 있는 이 이야기의 교훈과는 달리 우리 주위에는 태양의 방법보다는 바람의 방법으로 살려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것 같다.
그래서 온건한 외침 보다는 구호나 시위가 더 힘있다고 생각하며, 따뜻한 타이름 보다는 폭력적 매가 앞서야만 문제 해결이 빠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역사 속에서 이러한 행위는 하나의 악순환만 되풀이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한 바 있다.
어떤 체제 하에서도 단절은 악(惡)이며 대화는 선(善)이라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인가. 우선 한번쯤 멈추어 보자고 말하고 싶다. 오늘의 현실은 누군가가 보내는 하나의 신호(싸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멈추어 서서 그것이 푸른 신호인지 붉은 신호인지 먼저 보자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너나 없이 모두들 비상등을 켠채 달리고 있다. 그러니 신호등이 무슨 소용 있으며 그 앞에서 정상적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또한 무엇이 되겠는가.
하느님의 뜻은 구약시대엔 예언자들을 통해 알려졌고 신약시대엔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에 의해 전수(傳授)되었다. 그리고 성령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엔 「사건과 만남」이 그분의 뜻을 전달해 주는 도구라고 말 할 수 있다.
따라서 사건속에 드러난 그 분의 신호(싸인)을 먼저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주님의 뜻에 닿을 수 있고 주님의 뜻안에서 움직여야만 허무와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
영세받은 뒤 사람들이 쉽게 냉담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자신의 사건속에 담겨진 주님의 신호를 못 보았기 때문이다. 나의 현실과 주님이 연관없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신앙심이 우러나오겠는가.
오월은 자연이 창조주를 향해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달이다. 하루가 다르게 나무들은 색깔을 달리하고 대지(大地) 또한 자신이 품은 곡식들을 위해 햇빛과 비를 소중히 하는 달이다. 말하자면 가장 생산성 높은 달이 오월인 셈이다.
그렇다면 자연의 한 부분인 사람들도 오월의 법칙을 따라 성장과 변화를 계속해야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 변화는 창조주를 향해 움직이는 성장이라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참된 의미의 잘 사는 것이 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쏟아야 할 정성과 집념은 방향을 못 맞추고 이루어야 할 발전과 비젼은 엉뚱한 곳으로 흐르고 있으니 어찌 잘 산다고 말 할 수 있으며 누군들 불안해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것이 오월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니 이러다간 오월이 계절의 여왕은 커녕「집단 범죄의 달」외에 무슨 다른 의미가 있겠는가. 일년중 가장 잔인한 달이 5월이라면 그건 분명 잘못 된 것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왜 우리는 오월을 이렇게 보내야 하는가. 잘살기 위해서 인가. 그러나 잘 살기 위해서 싸운다는 것은 어딘가 어색하다. 화해하자면서 가두어 둔다는 것도 말이 안된다. 그건 모두 거짓말이요 거짓 행동이다. 거짓이 끼어들면 끼어든 그 만큼 결국은 신뢰을 잃게 마련이다.
잘살기 위해서는 타협을 해야한다. 그래서 타협은 현대의 덕(德)이라고 누가 말했다. 덕은 마음 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옛 선인들이 덕을 닦기 위해서 어떻게 했던가. 희생과 기다림 없이 수덕(修德)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덕은 저만치 밀쳐두고 걱정과 이해타산으로만 대립하려드니 어찌 싸움이 없으며 속임수가 생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오늘의 불안을 싸움과 속임수의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 신앙인은 5월이 본래의 성장과 변화로 돌아가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투쟁의 외침보다는 타협의 덕이 자리잡게 아버지의 도움을 청해야 할 것이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이(異)민족의 침입에서 구원되었을 때는 늘 기적이 뒤따랐다. 그리고 그 기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회개하며 선행을 베풀 때에 주어졌다.
회개의 첫 단계는 진실해지는데 있다. 누구도 진실해 지지 않으면 회개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고백성사를 보는 것도 「진실 연습」이다. 거짓된 자신을 고발하는 것이 고백성사이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 사회는 거짓말이 너무 심하다. 지도층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떡먹듯이 거짓말을 한다. 말로는 온갖 좋은 소리를 다하면서 행동은 조금도 그렇지 못하다면 누가 신뢰하며 언제 구원이 주어 지겠는가.
거짓말이 수반된 강경책을 천년(千年)이상이나 체험해온 것이 민중(民衆)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쌉쌀한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다.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오월은 평온한 오월이지 잔인한 오월은 아니지 않는가.
「5.16」「5.17」「5.18」간첩들의 난수표같은 이 숫자들이 마음의 달력에서 사라진 오월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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