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 싫든 좋든 사람서리에서 살게 마련이다. 가족이 그렇고 이웃이 그렇고 직장ㆍ사회ㆍ국가가 그렇다. 그런데 혈연으로 맺어지는 부모 자식 형제간이라해서 모두 뜻이 맞기만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야릇한 사람도 있어 뜻이 맞지 않는 부자도 있고 형제도 있다. 아귀다툼하는 부부도 있고 의좋지 못한 고부가 있고 시누이ㆍ올캐ㆍ동서간이 있는가 하면 서로 꼴도 보기 싫어하는 이웃도 있고 선후배ㆍ동료들도 더러 있는 모양이다.
요리재고 조리따지고 한치의 양보도 없는 어려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해도 그만 저래도 그만 무덤덤한 사람도 있다. 그래서 한쪽은 팔팔뛰어도 다른쪽은 그저 담담한 때도 있다. 진실로 순수한 사람들끼리만 만나 살 수 있다면 세상은 얼마나 살 만할까? 아마 인생은 아름다운 꽃길일 것이다. 달밤에 대금소리라도 듣듯 웅성깊고 현묘(玄妙)할 우리의 삶에 끼어드는 검은 손은 바로 요 얄궂은 사람일 수도 있다. 그들은 남의 호의를 제대로 받을 줄을 모른다. 「부담스러워요」하고 준 것을 도로 돌려 주는가하면 하찮은 남의 일에도 비꼬인 눈으로 입술을 비죽대며 공연스레 갉죽거려대고 깐죽거려댄다. 남이 일껏 머리를 짜서 잘 해보겠다고 내어놓은 의견을 모조리 트집잡고 자기 뜻과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점이 있으면 모든 회의를 무효로 돌리고 생각에 잠긴 남의 눈을 보고도 째린다고 트집하고 말씨 하나만 가지고도 대여섯시간을 깐죽거린다. 남의 진을 뺀다.
『힝! 그것도 논문이라고 썻어? 그런 거라면 난 벌써 백편은 썻을 거야』
『좋아하네 둥글둥글 슬슬하지 뭐 잘났다고 까불어 까불긴』
그들은 죄없는 사람의 가슴을 앙칼지게 할퀴어 참다못해 그 직장을 그만 떠나게도 하고、 울화병에 걸려 앓게도 한다.
차라리 쿡 찌르거나、 퍽 찔러 그 자리에서 상대방을 숨지게하는 것보다도 어찌보면 더 잔인한 수법이다. 그런데 이것이 부끄럽게도 지식인이라는 이들의 사회에서 이따금 일어나기도 하는 살인법이다.
우리네의 사회가 예전처럼 단순하고 또한 우리네의 마음이 고인처럼 너그럽고 담담했더라면 팔팔뛰다 떨어져 죽거나 암에 걸리거나 신격쇠약에 걸리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들이 좁고 사람은 북쩍대고 차들은 가로 세로 얽히고 설키고 갖은 소음ㆍ매연 게다가 상호불신ㆍ온갖 욕심에 뒤따르지 못하는 실력、거기서 일어나는 갈등 등등이 우리를 조바심스럽고 보채게 만들고 신경이 곤두서게 만든다. 웬만하면 견딜만한 상대방의 트집에도 곧잘 파르르하고 별것아닌 말씨에도 고까와하고 섭섭해 하고、 남의 눈빛하나에도 벌컥 성을 내게 됨은 아무리 환경의 탓도 있다지만 야릇한 사람 못지않게 당하는 이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따지려면 따지라지!』
『욕하려면 욕하라지!』
『깐죽대려면 깐죽대래!』
『갉죽거리려면 갉죽대래!』
하고 그냥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 야릇한 사람들을 상대하여 입씨름하고 눈싸움하고 속을 끓일 겨를이 없이 우리의 삶이 순수세계의 소요에 골몰되어 있어야 한다. 나중에는 깐죽대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서 말이다.
그리고 또한가지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를 반성하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더러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거나 가슴에 상처를 입히는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또 모르고도 저지르는 죄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이는 말한다. 『알고 지은 죄는 그래도 고칠 날이나 있지만 모르고 저지른 죄는 영영고칠 수가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구제받을 수 없는 죄는 모르고 저지른 죄다』라고. 물론、 생활습관이나 사회구조ㆍ환경의 차이로 모르고 저지르는 잘못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철없는 외곬의 생각 때문어 용서받을 수 없는 엄청난 죄를 저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알고 저지른 죄에 비겨 모르고 저지른 죄는 그 벌이 헐할 법하다. 허긴 우리는 죄를 짓는 쪽이지 그걸 판결하거나 벌줄 처지에는 있지 않음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 쪽인 것이다. 곯리는 쪽이나 곯는 쪽이나 다 똑같이 어여삐 여기심을 받는 쪽이고 그의 자비를 비는 쪽인것이다. 그런 주제에 남을 곯리고 깐죽거라다니. 생각할수록 깜냥 모르고 날뛰는 짓인것이다.
그뿐인가? 사람은 저마다 다르다. 그 얼굴 그 몸매가 이렇게 다르듯 생각하는 방법ㆍ하는 짓. 느끼는 깊이 모두가 판이할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 겠는가? 그렇게 나와는 전혀 다를 다른 사람에게 나와 똑같은 생각、 똑같은 행동、 똑같은 느낌까지를 강요함이 과연 올바를 생각일 것인가? 자기만이 옳고 남은 다 그르다고 보며、 그 그름을 교육적인 견지에서 시정해야 된다고 덤비는 이까지 더러 있다. 허긴 일체의 무관심보다야 일종의 애정의 표시일수도 있을 것이긴하다.
『이런 기회에 저들의 그릇된 생각을 뿌리 뽑고、 우리의 권위를 세워야 할 것이지. 한치도 양보해선 안됩니다. 우린 일치 단결해서 우리의 권위를 지켜야 합니다』
권위하는 것이 과연 세우는 것일까 생각해본다. 군군 신신 부부 자자(君君 臣臣 父父 子子)란 말씀이 떠오른다. 권위란 별게 아닐 것이다. 그야말로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와야 나라가 다스려지듯 임금은 임금다운 임금이 되어야 존경 받고、 신하는 신하다운 신하가 되어야 임금의 사랑을 받고 만백성의 존경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래야 나라가 잘 다스려진다는 말씀이다. 우리네 가정에서도 아비가 아비다와야 하고 자식을 또 자식구실을 해야 집안이 다스혀지는 법이다. 그러니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만하면서 임금처럼 아비처럼 예우받기만을 바라는 교사가 되지 말고、 우선 교사다운 교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럴때 교권이라는 게 서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교권을 세우기 위해 교사다운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런 마음을 지어 먹지말고 교사다운 교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옹졸하고 셈바른 아비가 효도를 전제로 자식을 기르던가?
아무리 갉아대고 깐죽거리는 동료가 있더라도、 주먹질하고 되받고 버릇없는 제자가 있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고 교사다운 교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비단 교사뿐아니라 우리 모두는 저마다 자기가 놓여 있는 자리에 따라 자기다운 자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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