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근래 「가진 사람들의 과소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스스로 자제해 줄것을 요망하는 여론이 점차 높아가고 있는 현실이다.
과소비 그 자체는 인간의 허영심을 자극하고 드디어 향락풍조로 변화되게 한다. 이로인한 결과는 말할 필요도 없다.
과소비는 망국으로 치닫는 지름길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세속적인 풍조속에서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과소비 퇴치」에 앞장서서 가장 모범적인 인류의 집단이 되어야 하는 우리의 교회도 일부에서는 세속적인 풍조에 휩쓸려 과소비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되고 있다.
그런데, 우선 물적 소유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의 신학적인 뜻부터 밝히고 싶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인간들이 살아갈 수 있는 조건으로 대자연을 주셨다. 인간이 자연을 개발해서 성숙의 길을 걸어갈수 있도록 안배하셨다. 인간은 자연개발을 통해서 「물질의 부」를 누리게 되었다. 이 자연을 모든 인간들이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고 모든 인류공동체의 공유물이다. 태양이 인류에게 빛을 주듯이 지구라는 자연은 우리에게 생명의 조건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태양과 지구 등의 자연으로부터 얻은 부는 엄격히 말해 우리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
인간들이 물질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거역, 죄를 범하는 현실을 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자.
물질 때문에 범하는 죄는 두 종류이다.
첫째는 「인색」에서 나온 죄이며, 그리고 「낭비」에서 나온 죄이다.
「인색」한 것은 수전노가 되는 비인격적인 것이고 「낭비」의 죄는 물질 사용의 질서를 파괴한 행위이다.
「과소비」는 곧 낭비의 죄에 해당된다. 하느님이 주신 물질은 원칙적으로 하느님의 뜻대로 사용되어야 가치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 시대에는 그물질이 하느님의 질서에서 벗어나 인간 쾌락이나 체면 또는 허영에 의해 움직여지기 때문에 소위 「과소비」라는 비극이 나타나게 된다.
옆집에서는 수해 때문에 먹을 것도 없는 판에 호텔에서 향연을 베풀고 있다면 그건 분명히 물질이 잘못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이웃은 거주할 곳도 없는데 호화별장을 가꾸어 나가는것도 잘못된 행위이다.
이런 현실속에서 교회안의 실상을 보자. 시골성당은 비가 오면 물이 새어 들어오는데 일부성당은 호화판으로 짓고 있다.
물론 하느님의 성전이란 명목으로 얼마든지 정성을 바칠 수 있다. 그러나 집도 없고 병들어 신음하는 이웃을 외면하고 주님이 수억의 제단ㆍ감실에 계실 수 있겠는가?
호화별장을 가꾸는 그런 과소비풍조에 따라 호화판 성당ㆍ값진 성당비품으로만 일관한다면 교회도 「과소비의 범죄」로 지탄받지 않겠는가.
일부 신자들의 세속회와 일부성직자들의 호화판 사제관이나 그들의 취미생활이 한 시민으로서의 도를 넘어산다면 이 역시 교회내의 과소비라고 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시골 어려운 본당은 외면하고 호하판 본당행사를 베푼다든지 남아도는 본당예산의 어떤 형태로든 소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아직도 우리 교회에 있다면 「과소비의 풍조」를 부채질하는 행위라 아니할수 없다.
「과소비 풍조」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모두는 주님이 주신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반성하며 「내탓이오」하는 겸손한 회개의 정신을 가져야겠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