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가정방문을 하다가 냉담중에 있는 한 형제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자신이 살았던 과거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빛나는 자랑을 들려주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매일 미사에 하루도 빠진 적이 없이 레지오 단장과 청년회장으로서 교회의 일에 누구보다 앞장 서서 봉사했으며 삶의 모든 중심이 신앙에 초점이 맞춰진 채 열렬하면서도 기쁨에 넘치는 신자생활을 했었다고 했다.
한참 듣고 감동하던 내가『그럼, 지금은 왜 안나오느냐?』하고 묻자 그는 머리를 긁으면서 좀 더 쉰 다음에 나가겠다고만 했다. 『이렇게 쉰 것이 벌써 30년이 넘는데 뭘 또 쉬느냐?』고 내가 다그치자, 그래도 좀 더 쉬었다가 나가겠노라고만 대답했다. 대화는 그리고 거기서 끝나버리게 되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 구호물자가 나오던 시기에 그는 아주 모범적이면서도 실로 눈부신 신앙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신부님의 신임도 듬뿍 받았으며 구호품의 배급에 있어서도 그에게 맡겨진 권한이 막강해서 보통 신자들은 그에게 크게 굽신거려야 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물자에만 눈이 어두워 신앙이 비뚠 상태에서 살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어느날 구호물자가 끊기게 되자 그들의 신앙은 급속으로 냉각되었으며 한동안 억지로 끌려다니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끝내는 주일미사까지도 딱 끊어버린채 완전히 외인이 돼 버렸던 것이다.
사람들의 신앙이라는게 참으로「요지경」스러울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소위 신앙심이라는 것이 너무도 간사해서 무슨 현세적이고도 물질적인 이득에 따라 이리 쏠리고 저리쏠렸다가는 그곳이 단맛을 상실하게 되면 가차없이 내던지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영세한지 몇 년 되진 않았지만 어떤 자매가 갑자기 열심해지기 시작하여 교회의 온갖 일에 열과 성의를 다하면서 믿음 속에서만 살더니만 어느날 부터는 성당에 발길을 딱 끊어버리면서 신앙과는 담을 쌓고 아주 외면을 하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럴수가 있나싶어 일차 전화로 사정을 물었더니 한마디로「믿어도 별것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냉정하게 대답하는 것이였다.
알고보니 그녀에겐 재수를 하는 막둥이 아들이 있었는데 이번엔「기도의 힘으로 합격시켜보자」하여 1년 동안 온잦 정성을 다 기울였는데 예수님의 응답이 없어 아들은 올해도 또 불합격했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자기만도 못한 자매의 아들은 그보다 더 좋은 대학에도 들어갔는데 정말 예수님이 야속하고 서운해서 더는 나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런 얘기들은 사실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며 비단 우리 본당에만 존재하는 그런 상처와 아픔만도 아니다. 어떤 부인들은 기적이 일어난다는 본당만을 찾아다니며 열을 내다가는 삼천포로 빠지기도 하며 부질없는 명예심과 질투 때문에 교회안에 온통 흙탕물을 일으키며 난리를 피우는 경우도 있게 된다.
유대인들은 일찍이 자기 백성 안에 존재하시는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오는 날에는 어떤 표정이 있고 또 어디에서 어떤 형태로 오신다는 것까지도 소상하게 밝혀 주셨지만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 안에 나시어 활동하셨던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메시아들 증오하고 경멸하여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이다.
사실, 유대인들의 신앙은 역사상 많은 기복이 있긴 했지만 그러나 세상의 어느 민족보다도 더 강하고 끈질긴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성서가 말하는 메시아를 진정으로 믿었으며 그리고 간절하게 소망하며 기다렸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메시아를 만나지는 못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아이러니요 일종의 모순이요 함정이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한가지 큰 잘못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메시아에 대한 그들의 꿈의 설정이 근본적으로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나라를 정치적으로 해방시켜 독립을 가져오고 경제적으로 부흥하여 배부른 민족을 이루며 또한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평화로운 생활을 가져다 주는 아주 강력하고도 능력있는 임금이나 장군에게 그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실 예수님에게 메시아의 기대를 걸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오천명을 빵 다섯 개로 배불리 먹이시고 병자들을 낫게 하시며 폭풍우를 잠재우는 능력을 보고는 바로「이분이다」하고 기대했지만 그러나 아무리 따라다녀도 그분은 민족의 현실 문제에 있어선 너무도 무기력 했으며 바보같이 보였기 때문에 그를 저버렸던것이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생각할때에 성서가 말하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로 어처구니 없고 너무도 답답한 일이지만 그러나 그런 모순과 위험들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크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신앙은 결코 현세와 물질을 외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분 나라를 소망하며 또한 그것 안에서 신앙은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신앙이 바로 거기에만 묶여져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신앙은 썩게 되며 올바르고 참된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
나는 왜 그분을 믿고 있는가?
우리는 실로 자신의 믿음을 다시 한번 성찰하여 진정 올바른 소망을 가지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신앙의 초점은 정녕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는 더 위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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