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의 병환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평소에도 위와 간장이 좋지 않으셔서 늘 당신 자신이 손수 화재하신 탕약을 복용하셨고, 아버님보다 세살 위이신 여든 한살의 어머님은 당신 자신보다 아버님을 더 보살펴드리고 시부모님 모시듯 섬겨 오시던 터였다.
그런데 이번엔 일으켜 앉혀드릴 겨를도 없이 자꾸 쓰러지시며 가슴과 등의 통증을 호소하시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유교가정의 9대 독자이신 아버님은, 집안간의 혼상예절 등 대소사에 당신의 명이 떨어지기 전에는 아무일도 거행치 못하게 하시는 분이셨다.
그 뿐 아니라 첨단을 걷는다는 양약을 마다하시고 늘 한약에만 의존하시며 손수 화재하신 약을 잡수셨다.
더욱이 다른 사람의 권유는 무시해 버리시기 일쑤였다.
내가 그리고 수녀님인 언니가, 예수님은 우리의 참된 구원자이시며 우리 죄의 희생제물이 되신 분이심을 기회있을 때마다 간곡히 말씀드리고, 유교경전과 그리스도교 교리를 비교하여 설명한 여러가지 책들을 사다 드리며 애썼지만 아버님은 고집 센 어린애의 도리질처럼 아니 사나운 비바람 가운데의 바위처럼 끄덕도 않으셨던 것이다.
그러니, 자식이래야 딸만 둘 뿐이고 어머님ㆍ아버님뿐인 네식구 중에 아버님만이 혼자 신자가 아니심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늘 무거운 짐을 진듯이 느껴질 수 밖에 없었고 보상없는 노력만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던 아버님이 이제는 눈의 초점이 흐려지시고 손발과 가슴이 얼음장같이 차디차게 식으면서 머리를 못드시고 계속 쓰러지시니, 큰일을 당하고야 말 것같아 뭐라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가슴을 저미는 듯한 아픔이 밀려왔다.
아버님은 그 상황에서도 손수 화재하신 약을 이것저것 바꿔드시며 이틀밤을 버티셨다. 아마 당신이 할 수 있는 처방은 다 내리셨으리라…. 그러나 더욱 기진해 하시고 차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누가 하느님의 그 크신 권능과 자비를 알 수 있었으랴! 뵙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느껴질만큼 괴롭고 걱정이 되어 나와 언니는 대세를 받으실 의향이 있으신지 조심스레 여쭤보았다. 처음엔 도리질 하시던 아버님께서. 몇 번을 간곡히 말씀드리자 드디어 『그렇게 해라』하고 말씀하셨다. 정확히 1989년 8월 4일 새벽3시에 아버님은 그렇게도 거부하셨던 일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아! 얼마나 오래전부터 계획하셨던 주님의 섭리셨을까?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인간은 그 자유의지가 자신의 본래적인 능력인양 교만하게 굴기가 쉽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조그만 지식으로 교만한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교만의 밑바닥까지를 다 드러낸 후에야 섭리를 베푸시나 보다.
아버님도 그 작은 지식의 모든 것을 다 털어 놓으신 후, 이제 이마 위에 자연수가 서서히 부어지고 있는 것이다. 조심스럽고도 또렷또렷 침착하게 대세 경문을 외우시는 수녀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아버님 이마에 경건하게 물을 붓는 손에는 가는 경련이 있는 듯 했다.
아버님의 본명은 요셉! 심중 깊이 깊이 고통을 묻어두시고 끝까지 당신아들의 십자가 밑에서 소리없이 흐느끼시던 그 고귀한 여인의 배필이신 성인을 주보로 아버님은 대세를 받으셨다.
성모 마리아의 일생과도 비슷한 어머님의 그간의 생. 그리고 그 배필이신 요셉 성인께서 요셉 성월마다 베풀어 주신 크고 작은 많은 은혜들…. 이 모든 것들이 예절을 받으시는 아버님을 지켜보는 동안 머릿속을 꽉 채워 정말 합당한 본명이요 너무나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억제 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다음날부터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신 후 많이 나아지신 아버님을 뵈면 저절로 기도가 나왔다.
『우리의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 사랑 깊으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은 우리가 아버님을 사랑한 것 이상으로 요셉할 아버지를 깊이 사랑해 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당신께서는 요셉 할아버지를 지켜보고 계셨던가요?
사랑 깊으신 하느님 아버지、요셉 할아버지를 끝까지 보살펴 주셔서 병마에서 승리의 깃발을 올리게 해 주신 지금 당신의 사랑을 더 깊이 알아 당신을 그 몸에 모실 수 있는 참 지혜도 함께 내려주소서、그리고 요셉 할아버지도 당신 은총에 한 몫을 차지하게 하여 주소서…』
아버님은 완전히 건강 하시지는 못해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신 후 많이 나아지셨다. 교리공부를 하실 날도 멀지 않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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