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성신강림축일이 다가오면 꼭 생각나는 일이 있다.
옛날 입회 당시 우리 대구 분도수녀원 앞뜰에는 패랭이꽃이 수없이 피는 잡초 낀 넓은 밭과 감나무가 줄지어 있었다. 가을이면 가지가 휘어지도록 매달리는 빨간 감이 탐스럽고 새벽마다 시작되는 참새들의 코러스. 이 참새 소리가 항시 아침신공의 전주곡으로 들려오곤 했었다.
그러다가는 어느새 기도소리도 들려 깜짝 놀라 눈을 뜨면 아직 종은 치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벽에 스며든 기도 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는 적이 지금도 가끔 있다.
또 어느 큰 수녀님의 『수도원 벽에는 마귀가 많이 붙어 있다』는 말에 될 수 있으면 벽 가까이에는 안 가던 순진한 시절의 일이다.
그때는 성신강림축일날이면 아침 일찍 일어나는대로 밖에 나가 묵상을 해도 좋다는 전례가 있었다. 그래 날이 밝기를 기다려 제각기 정원으로 나간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첫 이슬과 함께 성령을 받으려는 심산이다. 나도 부리나케 따라 나갔다. 나무사이를 거닐며 거룩한 묵상에 잠긴 수녀님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한참동안 왔다갔다 하는데 갑자기 뭔가 찍 떨어지며 어깨를 스치는 게 있지 않는가. 물론 불혀도 아니니 뜨거울리 없었지만 괜히 흥분이 되어 그쪽을 만져보니 참새똥이 아닌가. 혼자 빙긋이 웃을 수밖에. 아마 분심하는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이날 일은 잊어버릴 수가 없다.
요즈음 관공서나 가게에 가면 신자라는 분을 자주 만나게 된다. 우선 반갑다. 전철 안에서도 가락지 묵주를 낀 사람을 흔히 본다. 어떤 친절한 신자 할아버지는 전철표를 사서 손에 쥐어 주기도 한다. 길을 가면 성당이 근방에 있느냐고 묻는 사람도 더러 있다. 그리고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도 많다. 본당 미사에도 조금만 늦으면 앉을 자리가 없다.
확실히 하느님께서 우리 한국 사람을 총애하고 계심을 느낀다. 천주교 신자가 날로 증가함은 성령님의 큰 은사이다.
그런데 이 신자들의 얼굴은 날로 딱딱해지는 것 같은 인상이다. 나 혼자만의 기우라면 좋겠지만. 콘크리트와 아파트와 인스턴트 덕분인가. 촉촉하고 훈훈한 물기와 훈기가 점점 희석되어 가는 느낌이다. 소박한 인간미가 그립다. 성령님의 속성인 사랑이 엷어져만 간다. 부드러운 흙이 줄어질 때마다, 하느님이 깃들 자리가 없어진다. 요번 성령강림축일에는 돌같이 무딘 나의 심장에도 성령의 물과 불의 세례가 내렸으면 좋겠다.
이런 수녀님처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성령께 하루를 맡기는 생활로 돌아가도록 해야겠다. 성신이여 오소서! 나에게 밝은 명오를 비추소서.
가슴이 굳어 바싹 마를 때엔 자비의 소나기와 더불어 오십시요/ 우아함이 생활에서 잃어진 때엔 드높은 노래소리 더불어 오십시오/ 시끄러운 일이 사방에서 극성떨며 나를 가둬 버릴 때엔 말없는 주여、님의 평화와 휴식을 가지고 오십시오/ 구석에 갇히어서 내 거지 같은 마음이 웅크리고 앉아 있을 때엔 왕이여, 이 문을 부수어 여기고는 왕의 위의(威儀)를 갖추고 오십시오/ 욕망이 마음을 망상과 먼지로 눈멀게 할 땐 오 거룩한 이여, 깨어있는 자여, 님의 빛과 우뢰를 가지고 오십시오.
타고르의 「신께 바치는 노래」에서
지금까지 수고해 주신 이호자 수녀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음호부터는 대구대교구 교구장비서겸 성소국장을 맡고 계신 이용호 신부님께서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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