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이라는 책의 저자는 그 책을 쓰고자 했던 의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기록들에 의하면 1949년 이래 5년여에 걸친 소백 지리지구 공비토벌전에서 교전회수는 실로 1만7백17회, 전몰군경의 수는 6천3백33명에 달한다.
빨치산측 사망자의 수는, 믿을만한 근거는 없지만 줄잡아 1만 수천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피아 2만의 생명이 희생된이 처참함이, 세계유격전 사상 유례가 드문 이 엄청난 사건에 실록하나쯤은 남겨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것이다. 죽음이 모든것을 청산한 지금 그렇게 죽어간 많은 젊은 넋들에게 이 기록이 조그만 공양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라고 하면서 2만여명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찾으려는 처절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얼마전 모신문에서 작년 한해동안 교통사고로 죽은자와 부상자를 밝힌바가 있다. 그것에 의하면 교통사고 25만5천3백건에 사망자가 1만2천3백25명이고 부상자가 32만4천2백29명이라고 했다. 이것은 매일 34명이 죽고 8백88명이 부상당하고 있는 숫자라고 했다. 이러한 사실이 지리산 저자가 밝힌 5년여에 걸친 소백 지리지구 공비 토벌전에서 죽은 사람의 숫자와 비교해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그것도 5년과 1년이라는 기간을 고려해 본다면 더욱 그렇다. 한마디로 지금우리 사회는 교통사고 하나만을 가지고도 커다란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외 사고로 죽어가는 사람까지 합친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리산의 저자는 5년 동안 죽어간 2만여명의 죽음에 대해서 상세히 보고하면서 인간생명의 가치와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는 그러한 처참한 죽음들이 인간 삶의 현실적의미에 있어서 무슨 가치를 갖겠는가 하는 회의와 함께 인간 생명의 가치는 삶이 삶답게 이루어질때 그 가치를 갖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죽음의 상황이 다르겠지만 그 공비들의 죽음과 교통사고로 죽는 죽음 앞에서 무엇을 위한 죽음인가? 라는 물음은 공통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발전되어서 물질적 풍요속에 산다하더라도 그것이 인간 생명의 성장과 성숙에 이바지하지못할때 도리어 재앙의 원인이 될수도 있지 않나 하는것이다.
도대체 왜 내가 돈을 벌어야 하는가? 우리 인간의 물질적 발전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라는 물음은 지리산 공비로 싸우면서 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가? 하는 지리산의 저자의 물음과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볼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다시 말해서 점점 더 분주하고 바빠지고 있는 현실의 구조와 체제의 목적이 한푼이라도 더 벌겠다는 물질적 소유를 위한 것이라면 다른 상황의 전쟁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달려야 되고 일분 일초라도 더 빨리 움직여야 되는 긴장감이 전쟁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하는것이다. 내가 목적하는 것을 위해서는 내 아웃이 죽든 말든 달려야만 하는 듯한 풍토가 내 이웃의 생명의 소중성은 물론 나의 생명의 소중성마저 무시하는 듯한 정신나간 행동으로 치닫고 있는 듯하다는 말이다. 충돌하고 부서지면서 나도 너도 파괴하고 있는 듯한 우리사회의 모습 앞에서 왜 우리는 이렇게 정신없이 달려야만 하는가? 라는 물음을 물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몇몇 정치가의 야망때문에 전쟁의 사지에 내물리어 정신없이 싸우는 병사들의 모습과 지금 우리의 모습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아무리 구조적으로 멈출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잠깐만이라도 멈추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라는 한 인간의 모습을 쳐다볼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이웃의 모습을 볼수있어야 한다. 정신없이 치닫는곳, 그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냥 달리기만 하는 듯한 우리의 모습을 일단 멈추고 볼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진정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되겠고 또한 내 이웃이 진정 필요로 하는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간에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려고 하는 긴장감이 우리를 정신없이 달리게 했다면 그 긴장감을 풀어야 되겠다. 한때나마 조용한 성당 제대 앞에 꿇어 앉을 수 있어야 되겠다. 몸과 마음을 아버지 하느님께 맡길수 있는 여유를 찾아야 되겠다.
지금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한푼이라도 더 갖겠다는 물질적 추구가 아니라 나의 존재의 뿌리와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 찾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빵만으로 살수 없는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일이우리 삶의 원천이고 뿌리이신 하느님께 가는것이라면 우리 하느님 백성이 그것을 시작해야 되지않을까 한다. 그 어느때보다도 더 절실히 그것을 다시 시작함으로써 현재의 분위기를 바꾸겠다는 실천히 요구되는 때가 아닐까 한다.
조용히 기도하는 모습을 이세상은 보고 싶어할 지도 모른다. 오늘도 정신없이 달리다가 다치는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누군가가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우리 하느님 백성이어야 되지 않을까 한다.
잠깐 숨을 돌리자. 그리고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돌리자. 가을의 석양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볼수 있다면 얼마나 이 사회는 차분해 질수있을까? 하는 마음을 감출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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