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6월은 예수 성심 성월이다. 그리고 「성체와 성혈축일」이 지난뒤의 금요일은「예수 성심 축일」로 제정되어 특별한 신심 행사가 이루어지곤 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성심성월은 어딘지 성모성월의 그늘에 묻힌듯한 인상이 짙고 축일도 할머니들만의 차지가 되듯한 느낌이다. 잘 잘못을 떠나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 원인은 무엇이겠는가.
우선은 예수 성심에 대한 인식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왠지「예수성심」하면 막연히 고통받고 희생하는 마음만 먼저 떠올린다. 우리가 공경하는 예수님의 마음이 언제나 슬픔과 연결되어서 기억된다면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은 먼저 놀라울 만큼 넓은 마음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분의 언행(言行)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고 지금도 옹졸한 마음으로는 이해할수 없는 대목들이 성서안에는 많이 있다.
성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아이들을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엉겨붙는 아이들을 제자들이 뗴어놔야만 했었다. 이 장면은 생각할 때마다 흐뭇한 느낌이 든다. 또 예수님은 연설에 있어서도 대단히 정열적이였던 것 같다. 그 당시 수천명이 그의 설교를 들으러 모였고 어딘가에서는 사람들이 즉석에서 그분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기 때문에 피신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한편 자신의 행차를 막고 치유를 호소하는 장님에게 즉석에서 기적을 베푸는 모습이나 점잖은 식탁에 나타나 판을 깨는 죄녀에게 의외의 호의를 베풀기도 하고, 자신을 죽음에 몰아부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던 장면들은 요즘 표현대로 하자면 봉이 크고 도량(度量)이 넓은 분이 아니었더라면 상상도 못할 일들이다.
따라서 성심공경을 단순히 그분의 아픔에 동참하는 차원에만 머물도록 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넓은 마음을 배우고 전하는 차원으로 나아가게 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요즘은 민주화의 물결에 따라 마음보다는 목소리 큰 사람이 더 부각되는 시대인 까닭에 성심의 가르침은 더욱 새롭다 하겠다.
이러한 성심공경은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고 중세 때는 가장 대중적인 신심운동의 하나였었다. 그러나 요즘은 현대의 새로운 신심운동에 밀려 거의 잊혀져 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지만 모든 교육과 수련이 인간의 정신과 마음에 대한 호소라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이것은 꼭 반성해야 될 일이다.
또 요즘은 성서공부에 대한 열의가 그 어느때보다 활발하다. 교구 차원에서나 본당 차원에서나 전국적인 현상이다. 아마도 90년대를 맞으면서 가장 두드러진 교회내의 변화라면 이 성서공부의 열기를 드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성서공부의 많은 부분이 예수님 자신에 대한 공부보다는 예수님 주변의 문화와 풍습에 너무 치중하고 있는듯한 느낌이다.
성서연구의 핵심은 주님의 말씀을 오늘의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 것인가 여기에 있는 것이지 이스라엘의 역사나 문화에 대한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그분의 가르침에 더욱 가까이 가기위한 노력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서는 믿음의 글로 쓰여진 하느님의 말씀인 까닭에 마음보다 머리로 받아들이는쪽에 더 치중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새 호기심의 충족시간으로 성서공부가 변질될 수 있음을 알아야한다.
성심(聖心)은 글자대로 풀이하면 거룩한 마음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아무리 성스러운 마음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부르지는 않는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게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암시는 창세기에도 있다. 첫 부부였던 아담과 하와가 낳은 두 아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다. 성서에 의하면 카인은 동생을 질투하여 그를 죽인다. 그리하여 원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보여주는데 이 이야기는 또 한편 이제 모든 인간은 카인과 아벨의 모습 같은 두 마음을 공유하게 됨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두 마음을 지니고 두 얼굴을 지니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본질(本質)에 속하는 일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필연적으로 서로간에 상처를 주고 받는 관계가 형성될 수 밖에 없다.
세상에 아무리 선한 사람들끼리 함께 산다고 해도 이러한 관계는 만들어진다고 본다. 따라서 상처를 상처로 느끼지 않는 마음、상처를 상처로 받아들이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 그것을 깨닫는 은총을 성심성월의 주님께 청해야 하지 않겠는가.
「너는 내 맘 모른다」.
인간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초기에 가지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 느낌이 자라면 부부사이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성직자와 신자 사이에 보이지 않는 장벽을 키우기 마련이다.
말 그대로 내 맘을 모르기 때문에 내 맘을 알려 주든지 아니면 내 맘 알아 주기를 빨리 포기해야 되는데 그것이 안되기 때문에 오해를 하고 피해의식을 느끼며 미움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님의 넓은 마음을 공경한다는 것은 이러한 변덕많고 치사한 관계속에서도 삶을 영위해야만 하는 우리들에게 하나의 위로이며 희망이다. 그래서 성서를 복음 즉 기쁜소식이라 하지 않는가.
사실 기쁨은 본래 하느님의 것이지 우리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제 금년도 절반이 지나갔다. 생각하면 빠른 것이 세월이다. 사람의 마음도 세월앞에서는 약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약함이 하느님을 알았기 때문에 약해진 것이 되어야지 돈이나 권력맛을 알았기 때문에 약해진 것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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