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같으면 사람 만나는 걸 겁내지 않는 편이지만 두서너 마디하고 나면 이내 바닥을 드러내는 짧은 영어때문에 아래층에 내려가 차를 마시는 것을 포기하고 있으려니 여간 답답한 일이 아니었다. 억지로 잠을 청하느라 뒤척이고 있는데「파더 리」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양복을 주워 입고 내려와 보니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은 의외로 꼬마아가씨들이었다.
사제관을 나서자 3월 말인데도 눈발이 시야를 가렸고 차가 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 속도를 내는 것 같아 불안했지만 초면인 이들에게 천천히 가자는 말대신 조심스럽게『와! 이차 되게 잘 나가네…』하고 눈치를 주었지만 아가씨는 여전히 스피드를 죽이지 않았고『이제 18분이면 되요』하더니 악셀을 더 밟는 게 아닌가.『세례명이 어떻게…』하고 물었고 분명히 듣긴 들었는데 지금은 도저히 기억이 안난다. 그래도 이름은 잊어버려도 입가에 점이 있다든가 전화번호는 몰라도 그 집 전화기 색깔은 생각해 내는 도무지 도움이 안되는 것만 기억하는 것이 내 특기라면 특기다.
앵커러지에 온지 벌써 닷새째 아직도 밤낮의 바뀜에 적응을 못한 어정쩡한 모습이 안타까운지『피곤하지 않으세요?』하고 묻기에 견딜만하다고 대답했다. 촌스러운 말투에『신부님 고향이 경상도이시죠?』하고 단번에 맞추어 버렸다. 자동차가 여러대 주차해 있는 것을 보니 짐작에 저 집이 아닐까하고 머리를 굴리는데 아니나 다를까『신부님 다왔어요』하며 차를 세웠다.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아는 얼굴은 하나 없어도 순박한 얼굴들하며 귀에 익은 한국말이 얼마나 정겹든지…. 한국신부라는 이유하나 만으로 그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환영을 받았다. 그날은 구역모임이었기에 순서에 따라 성경낭독이 끝나고 내가 한 말씀을 하는 시간이었다. 부모를 따라온 아기들이 잘 뛰어노는 것 같더니 하필 그때에 화분을 쓰러뜨려 기어이 화초의 줄기를 끊어놓고 말았다. 아기아빠는 얼른 아기를 무릎에 엎어놓고『맞고 자랄래? 그냥 자랄래?』하고 물으니 아기는 겁먹은 목소리로『그냥 자랄래…』하고 눈치를 살피는 것이었다. 한바탕 폭소가 터졌던 것이 계기가 되어 이 말은 한동안 유행어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영적인 성장도 아기가 자라는 것과 같다.
하느님은 부모가 되어 우리를 보살펴 주며 자유와 책임을 그리고 순종과 희생을 가르치신다. 화염병과 최루탄, 노사분규와 부동산 투기 나아가 국가 간의 무역마찰도 지나친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 해결은 무었이었던가? 성서에 인과응보나 상선벌악을 체벌하는 기준이 아니라 성숙과 성장을 기다리는 사랑의 잣대로 본다면 결코 하느님은 인간을 미워하시지 않았으며 신약의 예수님을 보내셔야만 했던 깊은 사랑의 교훈이 그 해답이 아닐까 한다. 내가 잘못을 범할 때『너, 이신부야! 맞고 자랄래 그냥 자랄래』하시는 양심의 다그침에서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실감있게 만난다.
아마도 하느님보다 더 나은 교육자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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