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회의 두번째 한국인 사제이신 최양업 신부님은 1849년 4월 15일 상해 에서 강남교구장 마레스카 주교의 주례로 서품을 받으셨다. 그리고 12년간 사목활동을 하시고 1861년 6월 10일에 선종하셨다.
모방 나 신부님의 추천으로 다른 소년인 김대건과 최방지거와 1836년 3월에 신학생 으로 선발되어 1836년 12월 9일 경성을 출발하여 마카오의 파리 외방 전교회 경리부 레그레죠아 신부님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최경환 프란치스꼬의 장남인 양업은 아명이고 정구는 관명이라 한다. 최양업 신부님은 서품을 받으시고 귀국하시기 위해 어려움이 많으셨다.
박해의 칼날아래 순교자다운 고통의 대가를 치루어 관문의 감시를 뚫고 무려 다섯 차례에 걸쳐 수년간 입국을 시도, 드디어 성공하였다.
어렵게 귀국한 최양업 신부님은 박해로 인해 쓰라린 신앙생활을 하는 많은 조선교우들을 한사람 한사람 만나 위로하고 또 위로받으며 조선의 두번째 한국인 사제로서 민중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면서 사목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 등 교우방문을 위해 6개월을 쉬지 않고 걸어서 일차적인 답사를 시작 했다.
장마철 7월 한달을 빼고는 같은집에서 머무른 적이 거의 없으셨고 가는 곳마다 잠자리도 달랐다고 한다.
사목활동에 12년간을 돌아다니셨기에 얼굴은 숯덩이 처럼 새까맣게 그을렸고 갓끈 자국만 하얗게 두줄이 보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박해의 위험때문에 포교활동을 위해 산으로만 돌아 다니셨기에「산 사나이」란 별명도 얻으셨다고 한다. 긴장과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선교사의 발길이 닿지 않는 구석진 산골마을 교우촌으로 다니시면서 특히, 불쌍한 여교우들을 위로하고 도와주셨다.
최양업 신부님은 일정한 거주지 없이 전국을 두루 다니던 중 어느날 공소 회장집에 들렀다가 배반자의 밀고로 포졸들이 들이닥쳐 맨발로 뒷문을 통해 산속으로 도망 가야만 했었는데 그것은 또 다른 양떼들을 돌보아야 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실제로 신부님의 12년간동안의 포교활동이 조선 교우에게 미친 영향과 위로는 엄청났지만 신부님의 활동지가 벽촌이나 산골을 주로 사목하셨기 때문에 공적인 사료의 기록이 미비하기 때문에 형제 친척들의 기록만을 들추어 낼 수 밖에 없다.
최 신부님의 세째 동생인 최바실리오의 회고록에『주교의 분부로써 진천 동골교우촌 에 유하시며…』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으로 보아 진천을 중심으로 전교하셨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또 장 베르뇌 주교는 최양업 신부님에 대해『뛰어난 재질을 가진 그는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본분을 지극히 정확히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령 에 힘썼다』고 밝히면서『최양업 신부님의 죽음은 나를 몹시도 난처하게 했다』고 말했다.
장주교는 최신부님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으며『최양업같은 인물이 조선에 10명만 있었으면 얼마나 좋으랴』하며 한탄했다고 한다.
안다 뵐뤼 주교도 진심으로 애도했고『희귀한 그의 성덕과 변함없는 그의 열성, 만사를 잘완 수 할 수 있었던 그의 수완과 민첩성. 그의 죽음은 우리에게 얼마만한 낭패이며 절망이고! 실로 통곡할 노릇이다』라고 슬퍼 했다고 한다.
1857년 3월 25일은 조선 교회에 최초로 성직자 회의가 열렸다.
우선 장 베르뇌 주교는 다블뤼 안 신부를 선택해 보좌주교로 임명하였다.
성성식을 가진후 메스트르 이신부와 쁘니니꼴라 박신부와 최영업 신부 등 7명의 성직 자가 모여 3일간에 걸쳐 회의가 있었다.
그내용은 조선선교사의 모든 행동 규칙을 당시 상황에 맞게 할수 있도록 활동계획을 수립하였고 특히, 그들 사이의 애덕 결합을 굳건히 하였다.
최양업 신부님은 1858년에 성교공과 번역을 끝내고 사본문답을 준비중, 연중 주요기도서를 편찬함과 7ㆍ8종의 성서, 교리서, 신심서, 천주가사,등을 만드셨는데 대개 신부님의 별세 후에 인쇄되어 나왔다.
최양업 신부님의 사사은 생애를 통해서 본다면 한마디로 서민대중을 교화시킨 사제이고 평등정신의 실천자였다.
또 조선의 쇄국정책의 모순을 알고 다른나라와 대등한 위치에서 개화시켜야 한다는 사명감과 포부를 품고 있었다.
최양업 신부님은 가난하고 의지할데 없는 당시의 박해상황에서 목마른 양떼들의 목자로서 복음을 전하는 사제였다.
사제품을 받고 조선에 입국하시기 위해 반달 걸리는 뱃길에서 조선교우들을 만나볼 열정으로 신부님의 가슴은 얼마나 설레었으냐!
조선에 도착해서도 가족들을 만나보는 것은 접어두고 동포에 대한 강한 민족애에 그리스도 복음을 알게하고 진리를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포교정신과 사명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요즘의 사제들은 거의다 자가용은 가지고 있지만 그 당시는 산골 교우촌을 방문 하려면 골짜기마다 이루어진 공소를 일일이 걸어서 박해를 피해 신자들을 찾아 돌보아야 했다.
최 신부님은 교우들은 방문할때마다 그들의 가난하고 어려운 삶에 대해 가슴아파하셨고 그들은 잘 먹지도 못하면서 하느님을 섬기는 정신만은 굳굳하여 박해를 두려워 하지 않는 신자들의 모습을 볼때 신부님 자신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신자들이 어디에서도 정신적인 안정을 찾을 수 없는 괴로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있다.
그 시기는 철종이 나라를 다스렸으며 조선 5백년사에서 가장 사회가 문란하였던 때로 양반 관료들의 행패가 극에 달하였고 일반민중은 탐관오리들에 의해 착취 당하 는 때였었다.
그들중에 천주교인들은 구체적으로 박해와 괴롭힘을 당했다.
천주가사는 최양업 신부님이 지으신 책중에 대표적인 것으로서 27편으로 되어 있으며 사향가, 영세가, 천당가, 지옥가, 애덕가,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등의 형식으 로 나누어져 있다.
이것은 바로 교리내용을 조목지은 것인데 그 당시 서민들 특히, 여인네들은 한문도 한글도 잘 몰랐기 때문에 쉽게 교리를 배울 수 있도록 교리에 노랫말을 붙여서 흥겹게 따라 부르며 익힐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최양업 신부님은 순교도 못한 분으로 오해할수도 있겠으나 그 당시 조선의 삼엄한 박해속에서의 전교는 최 신부님 한분의 순교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많은 신자들을 보살펴야 했고 또 교회를 위해선 최양업 신부님 스스로 살아남아 있어 야 했던 것이다.
일부러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숨어 지내며 산속으로 피해다니셔야 했던 신부님의 고충을 읽을 수 있을것 같다.
북경의 주교님께서도 이런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이제 조선에 두분의 사제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한명은 순교할 수 있어도 나머지 한명은 순교할 수 없고 끝까지 교회를 위하여 일해야 한다』이 말씀을 김대건 신부님의 서간을 통해서 전했다고 한다.
한국의 사제로써 두번째이신 최양업 신부님은 첫 사제이신 김대건 신부님보다 박해중 에 12년간이나 활동을 하셨고 온갖 박해와 고초를 다 겪으시면서도 조선 교회를 돌보았으며 교회를 재건하고자 애쓰셨다.
그리하여 기초적인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 놓는 등 많은 고통을 감수하셨다.
지난 2백주년 행사며 교황님 방문 등 한국 교회의 큰 영광이 있기까지 최신부님의 공로를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최양업 신부님의 업적은 우리교회의 기초적인 발전을 다져놓았다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굳건한 교회 모습을 이룩하기 까지 쏟으신 그 정열은 교회를 토착화 시켜놓은 것이라고 모든 분들이 말하고 있다.
구전인지 모르지만 최양업 신부님은 1861년 경상도땅 문경세재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지며 어느 공소에서 잘못먹은 음식으로 객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최 신부님의 공소방문 소식을 전해들은 교우들은 이웃마을에서 잡은 돼지다리 하나를 구해다가 처마끝에 새끼로 매달아놓고 기다리는데 신부님은 일주일이 넘어도 오시질 않으셨다.
최 신부님이 도착했을때는 이미 고기는 상해 있었지만 마땅히 대접할 것도 없어 가난한 교우들은 정성을 다해 신부님께 대접해 드렸는데 이것을 잡수시고 식중독을 일으키신 것이다.
신부님께서도 상한 것을 아셨겠지만 교우들의 성의와 사랑을 생각해서 드셨으리라. 이리하여 보름간이나 고생을 하시고 급기야 운명에 놓였을때 배론의 쁘니니 꼴라 박 신부님을 모시고 종부성사를 받게 했고 그 시신은 배론 뒷산에 안장되었다.
이 묘지는 박해로 인해 주인없는 무덤으로 버려졌다가 1942년 이후에야 비문을 세우는 등 처음으로 묘지를 단장하였고 1989년에도 상석도 갖추어 놓게 되었다.
성인묘지가 아니어서인지 보잘 것 없는 모습이지만 신부님은 분명 하늘나라에 계실 것이며 연약한 우리들을 위해 잘 살도록 간구해 주시리라 믿는다.
최양업 신부님은 이렇듯 12년간 조선팔도를 두루 다니시면서 사목하셨고 당신의 몸은 돌보지 않으시면서 오직 조선의 목마른 양들을 위해 일생을 불사르셨다.
이에 교회사를 연구하는 분들은 입을 모아 김대건 신부님이 피의 순교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늘의 후배 신부님들은 최신부님의 그 정신을 본받아야 할것이고 우리 모두는 하루 빨리 최양업 신부님이 복자와 성인 반열에 오르시도록 많은 기도와 희생을 바쳐야 하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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