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물신(物神)이라 했지만 이 말은「물권(物權)」정도의 뜻을 풍자적으로 좀 과장해서 그렇게 말해 본 것이다. 현대는「매먼(富)」을 숭상하는 시대이다. 적어도 여러 가지의 징후로 봐서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뭣보다도 황금을 쫓는 일은 바로「물신(物神)」을 추앙하는 일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현대는「물신(物神)」이나마 제대로 대우를 하고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시대의 탁락상이 심각하다는 것을 짐작케한다.
인권을 옹호하는 소리는 이제 많이 들어 온 터이다. 인권의 소중함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것이지만、사실 따지고 보면 물질이 지니는 그것의 권리 곧「물권(物權)」도 매우 소중하다 하지 않을수 없다.
물질의 혜택을 떠나서 사람이 순시도 생존할 수 업음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물질이 지니는 그 본래의「물권(物權)」도 알맞게 존중할 줄 알아야 할것이다.
물질 안에 영혼이 있다고까지 생각할 필요야 없겠지만, 물질도 어떤「영성(靈性)」으로 채워져 있다고 상상하는 일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그것을 곰곰히 생각하며 들여다보면 단박에 그것이 지니고 있는 어떤 신비함의 문이 열린다. 태양아래 반짝이는 바다의 천파 만파를 볼때 거기에 깃들어 있는 「영성(靈性)」을 뉘라서 부인할 것인가.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우주안의 삼라만상이 바로「신령(神靈)함 자체(自體)」라 할 하느님의 피조물 아닌 것이 없으니, 아무리 작은 물질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영성」의 편린이 숨어 있지 아니할 까닭이없다. 하느님이 만드신 물질을 소중히 알고 그것을 알뜰히 아껴 쓰는 일이 바로 하느님을 올바르게 흠숭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거리에 나서 보면 멀쩡한 가구, 도구, 재료들이 마구 버려져서 나뒹굴고 있다. 물건들이 억울하게 버림받고「물권(物權)」을 유린당해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 같다.
낭비의 정도가 어떤 한계를 넘은 느낌이다.「물신(物神)」의 분노가 눈에 보이는 것 같다. 저렇게 물질을 학대하고도 무사할 것인가? 성적으로 문란한것만이「소돔과 고모라」인가?
못질 몇개만 하면 몇년이고 더 쓸만한 가구를 버린 대신에 그 사람의 집안엔 번쩍번쩍하는 또는 으리으리한, 유행따라 만들어진 새 가구가 들어설 것이다.
버려진 가구는 이제 막 길이들어 반들반들하고 알맞게 새 때가 가셔 정말 이제부터 그 주인에게 충복 노릇을 할 차례이다. 그러니 한 가구가 제 수명을 다해서 버림을 받는 경우가 아니라 순전히 주인의 허영심을 위해서 비극적인 희생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변덕이 저지경이라면, 허영이 저 지경이라면, 저런 집 주인이 조강지처하고도 (또는 남편하고도) 끝까지 화목할 수 있을까?
당초에 하느님 대신「물신(物神)」을 (곧 탐욕과 허영을) 택했다면 그것이 잘 된 선택일리가 없고, 또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라면 일이 잘 돼나갈 리가 없다. 따라서 자기도 모르게 「물신(物神)」에서 추앙이「물신(物神)」의 학대로 빗나가고, 그럼으로써 무서운 재앙을 스스로 불러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하늘과 바다와 땅 어느곳에서고 이제 그 극에 달한 느낌이 드는 공해는 뭣에 기인하는가? 인간의 탐욕이 결국 그 원인이 아니겠는가? 공해의 그 무서운 폐해는 바로 말없는 「물신(物神)」의(결국은 하느님의) 보복과 응징이 아니겠는가?
끔찍할 정도의「물권(物權)」의 유린 중에서도 가장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종이의 낭비이다.
기가 막힐 정도로 품질이 좋은 고급 양지에 뭣인가 기가 막히게 곱고 화려한 무늬가 인쇄 돼 있다. 그런 것이 낙엽처럼 흩뿌려져 있다. (물감의 낭비 역시 굉장하다) 뭣인가 하고 집어보니「부우츠」의 광고다. 아아, 그종이가 얼마나 스스로의 신세를 한탄할 것인가. 종이로 태어나서 겨우 허영가의 허영을 부축이는 경우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는 부츠 광고에 쓰이고 말다니. 부츠하고도 저것은 또 얼마나 낭비가 큰 부츠인가. 소 한마리 잡아서 저런 부츠 몇켤레가 나올 것인가.
종이는 본래 아름다운 수목이었다. 바람에 쓸리어 바다처럼 물결치는 큰 숲 속에서, 여러 식구들과 함께 할아버지 나무, 할머니 나무, 아버지 나무, 어머니 나무, 또는 형제 자매 나무들과 함께 오손도손 얘기하며 평화롭게 지내오던 것이 온 가족이 하루아침에 학살되어 이른바 문명국의 종이로 바뀌어서 이러한 최악의 운명을 맞게 된것이다.
나무의 무차별 벌매는 곧 대기 중의 산소의 결핍을 뜻하며 이것은 곧 인류의 집단적인 자살과 다를 바가 없다. 종이의 소비량이 곧 그 나라의 운명의 척도가 된다고 여겨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러한 종이의 소비량이 곧 허영적 낭비의 수치가 되는 것이라면 그러한 운며의 말로가 어떨 것인가는 물어 볼 필요도 없다.
재주와 꾀로써 사람이 물질을 이렇게 저렇게 변질시켜서 이용하고 있지만, 정작 그 물질 자체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모래알 한 톨인들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젓가락이 되는 나무, 쇠붙이, 은 따위가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가. 아름다운 사연을 적을 수 있는 종이와 펜이 얼마나 귀하고 고마운가. 우리가 물질을 알뜰히 아껴야 하는 까닭은 그렇게 함으로써 돈이 고이고 가세가 일어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작은 물건이라도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것이니 감사하고 아껴 쓰며 검소하게 살아 나가는 일 자체가 바로 하느님을 올바르게 흠숭하는 첫걸음이 된다는 그 이유 때문이다.
지금까지 집필해 주신 정양완씨ㆍ오재호씨ㆍ신은근 신부께 감사드립니다. 이번호 부터는 성찬경 교수 (성균관대 문과대학장) 조철현 신부 (광주대교구 저전동본당) 한홍순 교수 (한국외국어대 상경대) 변평섭씨(대전중도일보 편집국장)께서 수고하시겠습니다.
성찬경
◇1930년 충남예산생
◇고 조지훈씨 추천으로「문학예술」지 통해 문단에 등단
◇서울대 문리대ㆍ동대학원 영문고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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