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의구현과 평화정착을 위해 노력을 했으나 백약이 무효로 불의와 불화 속에 신음하고 있다.
우리가 불의와 불화를 정의와 평화로 회복하지 못하면 자타공히 이 땅에 존속할 수 없다. 수차례나 정권이 붕괴된 이유가 불의에 있었다.
불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아니면 어떠한 것도 불의니 정의의 어원을 보면 될 것이다.
즉 정(正)은 일지(一十止)호 하늘의 뜻에 머물러야 바르다는 뜻이고 의(義)는 양아(羊十我)로 내가 양같이 남을 해치지 않아야 의롭다는 뜻이니 그를 떠나서 정의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우리의 정의가 반세기나 되어도 불가한 근본이유가 불의의 씨앗을 뿌리고 정의를 원하기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뜻을 하늘에 두고 살면 정의구현이란 표어를 써 붙이지 않아도 정의사회가 되는 것이 천리(天理)이다. 그런데 뜻을 황금물질에 두고 불의한 수법으로 축재를 하고 뺏으니 보리를 심고 보리밥을 먹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니겠는가?
한편 나라에 국법이 있는한 위법자를 좌시하지 않는다면 자연법은 인간의 위법을 묵과하지 않으므로 정의도 그 법을 따르지 않아서 불가한 것이다.
나라의 기틀인 서민을 경시하는 정부는 어느 시대나 용납하지 않으므로 서민의 생활안정이 선결되야 하는 것이다.
한편 평화도 예외가 아니다. 이것 역시 어원이 그것을 제시해주고 있다.
즉 평(平)은 양쪽이 모습이 같고 반(半)에 일(一)이 위로 하면 평자가 되지만 밑으로 하면 반이 되는데 하느님을 위로 모시면 모든 것이 공평하게 되지만 밑으로 끌어 내리면 반쪽으로 갈라지니 남북이 갈라지고 노사분규가 꼬리를 물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화(和)는 벼와 입이 만나서 화합할 수 있는데 일을 해도 입에 먹을 것이 없고 화평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평화가 오려면 인권이 평등하고 정의분배로 같이먹고 살아야 될 터인데 빈부의 차는 천양지차로 있는 자는 비대해서 살빼기에 고심하고 없는 자는 도둑질을 하니 평화가 가능하겠는가?
예수님은 뜻을 하늘에 두고 순명으로 일관하셨고 만민을 차별없이 인권을 존중하게 대하시어 명실공히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시고 애주애인의 사랑의 계명을 주셨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도 그 아니면 정의평화를 이룰 수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범을 보이시고 가르치셨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 법을 떠나서 정의를 구현하고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겠는가?
뜻을 하늘에 두고 살면 마음이 정직해서 무엇을 해도 마음이 편하고 높은 곳을 깎아 내리면 평지가 되듯이 평화는 교만은 겸손으로, 부의 산을 헐어서 궁핍의 골짜기를 메우고 인권을 평등하게 해야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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