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폭력이란 말을 사용할때는 비논리적이고 이성을 벗어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가정폭력, 성폭력, 성적-언어 폭력 등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말들이다. 폭력에는 논리성이나 이성적인 사고가 성립되지 않는다. 글자 그대로 폭력으로써 힘의 대결이나 무지, 약자에 대한 강자의 강권, 무식한자의 잔인한 힘의 대결이다.
며칠전 자유를 존중하는 미국사회에서 토마스 연방대법관의 인준 문제를 놓고 성적-언어폭력에 대한것이 사회적인 큰 문제로 제기 되었다. 성적-언어폭력, 성폭력은 우리사회에서도 꼭 생각해야될 문제이다. 성적인 자극적인 말을 써서 성(SEX)의 역할 내지 차이점을 강조하려고 하고, 성폭력에 대한 행위에 대해서 무감각한 반응을 보이는 폭력자, 타의에 의한 사고를 그냥 참아야만 하는 약자들, 심지어는 공기관 경찰에서도 여대생을 성폭력한 사실을 놓고 진의를 가리는 일, 성폭력의 피해자가 10년이 넘도록 정신적인 고통을 당하다 결국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 등등. 무서운 사실이다.
육체적인 폭력이든 정신적인 폭력이든 모두가 인간인 한에서 인간성에 대한 반기를 드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폭력자들은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자이다. 인간인 한에서 우리 모두는 존엄성을 가졌고 우주의 질서 속에서 꾸준한 노력으로 성실하게 자기 삶에 임하고 있다. 자기존엄에 대한 인식이 있다면 폭력을 행하지 못할것이다. 성은 생리학적이고 본능적인 의미와 교육적인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두가지 측면 모두 인간성숙과 더볼어 발달되고 가꾸어 나가야만 하는 과제를 지니고 있다.
본능적인것은 다분히 생물학적인 것이고, 생물학적인 것은 교육을 통해서 가꾸어 나가야만 하고 자아통제를 요구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절대적으로 안되는 것과 본질적으로 바꾸어 질수 없는 것이 있다. 자기 존재는 자아뿐이므로 본질적인것이고 양심에 어긋나는 것은 절대적 선을 넘어서는 것이므로 안된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인 한에서 가치를 인정하므로 자기존엄성에 근거한다.
둘째로는 피폭력자의 자세이다. 과연 폭력의 범주가 어디까지인가말이다. 직접적인 성폭력이나 성적언어폭력의 경우도 모두 성폭력인 것이다. 물론 후자는 정신적인 측면이다. 성적-언어로 토마스 대법관이 자기조교를 희롱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 경우 동서를 막론하고 남자의 몇%가 폭력자가 아니란 말일까? 물론 고의성과 농담을 구분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들은 정신적인 성폭력도 문제로 제기하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미국인의 정신적 의식이 그만큼 다른 것이다.
아직도 사회적 조건이 전문직을 제외 하고는 남성에게 유리한 한국적 상황에서 여성들이 겪는 고통과 갈등은 드러나지 않는다. 남자들이 사용하는 성적언어폭력에 대해서 여성 스스로 의식을 가지고 확실한 태도를 표명해야한다. 직장에서 상하의 수직적 관계에서 야기되는 미묘한 언어적 폭력 까지도 의식적인 반응을 가져야 한다. 남성들 자신도 성의 차이점을 강요하기 보다는 한인격체로서 여자를 보아야할 것이다. 즉 폭력자와 피폭력자, 남자와 여자 모두가 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필요로 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폭력자-피폭력자 모두가 공범이 될수 있다는 사실도 인식 해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성을 어떻게 가꾸어 나가느냐 하는 문제이다.
폭력자는 늘 가능성을 찾는다. 폭력의대상, 기회, 장소, 동기 등등을 찾는다. 또한 피폭력자는 대부분 자기질서, 규칙 또는 자기관리에 소홀하다. 인간은 외적질서의 영향을 받으면서 내적질서에 의해서 발달과 성숙을 규정하게 된다. 또한 인간은 제도화된 사회속에서 규칙을 지키면서 살아 가게끔 되어있다. 이러한 규칙은 자기관리를 하는데 대단히 편리하게 만든다. 정신적인 질서와 규칙을 지키면서 자기관리를 해나갈때 인간은 도덕적인 질서까지 도달하게 된다. 또한 도덕적인 질서는 자기관리에 정점을 이루는것이다. 이러한 세가지 단계를 거쳐서 자기 삶의 자세를 가꾸어 나아갈때 인간은 폭력자도 피폭력자도 될 수가 없다. 자신을 가꾸어 간다는것, 자신을 도덕적인 질서에 도달하게끔 관리 한다는 것, 바로 이러한 것들이 폭력자도 피폭력자도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모두가 때론 성폭력자도 성피폭력자가 될수 있다고 한다면 성폭력에 대한 문제는 바로 지금 우리들의 문제이므로 창조주가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의 본질적이고 고유한 특성을 이해해서 본연의 사명감을 완수하도록 노력하여 창조주의 창조사업에 폭력자도 피폭력자도 아닌 아름다운 우리로 참여 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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